로마서 11강(롬 1: 23~32), 지금 내리는 진노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 1:24-32)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류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에 복음을 믿어야 되고 구원을 얻어야 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로마서 1:18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노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경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를,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얼마나 큰일인가를 밝혀 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사실이고 우리의 신앙에 근거가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사랑하기 위하여, 더 경건히 살기 위하여’라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습으로 각색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현실적이고 영원한 우리의 운명에 관한 문제인 것을 직시하고 이 복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을 너무 미래적이고 내일에 관한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악하고 불의한 행동에 대한 보응이 멀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서 신앙적인 승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게 되고 그 말씀에 따라 살게 되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를 믿어 복을 누리게 된 것은 천국에 가셔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때 가면 완벽한 것을 누립니다.
다시 죽음이 없고 이별하는 것이 없고, 울 것이 없고 아프거나 죽는 것이 없는 데로 갈 것입니다),
지금 현실 세상에서도 예수를 믿고 나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모든 것을 누립니다.
하나님과 동거하는 기쁨, 건전한 삶의 보람, 진리와 생명으로 쌓아져 나가는 우리 인생의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을 실제로 지금 누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거룩과 평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락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불신자들은 지금 당장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지금 당장 누리는 복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지금 당장 당하는 진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리석은 유혹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그 부러운 눈치,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미혹, 이런 것들을 오늘 이 말씀들을 분명히 해서 마음속에서 몰아내도록 합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지금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진노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어떤 형태로 내리고 있느냐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과 같은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 대한 진노와 벌주심은 ‘내어버려 두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4절에 있었고 26절과 28절에도 있었습니다.
‘내어버려 두셨다’고 말씀이 나옵니다.
어떻게 내어버려 두셨으며 그것이 어떠한 벌인가 하는 현상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로 24절과 26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욕심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셨다 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욕심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셨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는 이것이 왜 벌이냐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자유라고 합니다.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야기할 필요 없이 여러분, 자녀들하고 예배 마치고 가서 의논해 보십시오.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죽었다 깨도 안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열 개 써라 해도 공부는 안 들어갑니다.
하고 싶은 것 100개, 그래도 공부는 안 들어갑니다.
어렸을 때는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공부의 어려움이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필요성을 알지 못할 때 준비해야 되는 것이 공부의 어려운 점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제 가서야 누구나 알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누구나 알게 됩니다.
심판에 서는 날, 누구나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늦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여러분께서 예전에 학교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들이 반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뭐 할까?”하면 “놀아요.”하던 기억이 납니까?
그 논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슨 카드를 치자는 것입니까, 마작을 하자는 것입니까?
공부는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공부는 말고 무엇이든 좋으니까 ‘놉시다. 놀아요.’ 그랬던 기억이 나십니까?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놀면 잘하는 것이 많습니다.
전자오락 잘하고 뭐 하여간 잘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에게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큰아이가 하루는 아침에 학교 갈 때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머리를 적당히 하고 나왔습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물었어요.
“야 오빠 멋있냐?” 그러니까 “오빠 멋있어. 공부 잘하는 학생 같애.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하면 노는 학생 같아져, 오빠.”
그러니까 지금 어떻다는 거예요? 멋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우린 예전에도 공부만 하는 학생을 놀렸던 기억이 있지 않았습니까?
조금 날나리로 노는 학생을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용기 있다고 생각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기억,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명예도 아닙니다.
저희 친구들이 모였을 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병으로 군대를 갔다 오고 그 중에 하나만 장교로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이상하게 ROTC를 혼자해서 장교로 갔다 왔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요령을 부리고 가짜 휴가증을 얻고 가짜 외박증을 얻는가 등의 이야기들을 하며 한참 자랑을 하는데 그 친구만 인상을 쓰고 있더라고요.
‘넌 왜 그래?’ 그랬더니 자기가 군대있을 때 그런 놈들이 얼마나 꼴 보기 싫은 줄 알았냐는 겁니다.
그는 장교였거든요.
서로 입장이 다르니까 일이 달라지더라고요.
우린 얼마나 요령껏 농땡이를 부렸느냐가 자랑이었는데 지휘관으로 책임이 있었던 그 친구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사람이 제일 못난 놈이었거든요.
우리가 지금 실수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어냐 그럴 때 24절과 2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셨는데 왜 그것이 벌이 되느냐 하면 더러움의 정욕 때문입니다.
24절에 그것을 더럽다고 하고 26절에서는 부끄럽다고 합니다.
더럽고 부끄럽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벌입니다.
진흙 구덩이에서 노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 구덩이에서 진흙놀이를 하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닦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재미있는 만큼, 분탕질을 한 것만큼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삽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금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여러 가지 현대 문명의 부산물들을 하나, 둘씩 맛보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회가 성적으로, 폭력적으로 나쁘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는 시대에나 나타나는,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가장 타락한 모습입니다.
정신적인 타락과 폭력은 여러분이 영화를 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요즈음 영화같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성적인, 타락과 폭력이 난무하는 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 예전에 봤던 ‘7인의 신부’라든가 ‘세계를 그대 품 안에’이런 맛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레고리 펙’ 나오고 그러던 시절은 다 지났고 살벌무쌍한 것뿐입니다.
영화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큰 문제가 무언가 하면 우리나라도 이미 성적인 타락과 폭력이 난무해서 여자들이 차타고 가다가 사고 나면 문 열고 나오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 중에 어떤 분의 딸 아이 하나가 잡혀 갔다가 풀려 나왔습니다.
며칠 동안 실종됐다가 이틀 만에 돌아왔는데 밤길을 가다가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풀려났습니다.
밝은 날 보더니 “야 어떻게 저런 걸 잡아왔냐?” 그러고 미안하다고 차비주어서 보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원래대로 태어났으면 다 그럴 것이거든요.
“야 어떻게 저런 아이를 데려왔냐?” 하고 차를 태워서 보냈을 텐데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잘난 척 하느라고 전부 돈 주고 얼굴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자베스 테일러같이 되려고 해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누구나가 다 오누이들 같고 자매같이 됐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것 아닙니까!
“아휴 저 여자 좀 봐. 남편이 능력이 있어서 일본 데려가서 싹 판갈이 해주는데 나는 어쩌다 이런 남편 만나 점 하나 빼자는 데도 안 될까?”
우리의 불평이 그것 아닙니까!
그렇게 이쁘게 생긴 여자가 생겨나는 이유가 뭡니까?
남자들이 이쁜 여자를 원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인신매매범이 생긴 이유는 무슨 폭력범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술집에 가서 예쁜 호스티스들을 자꾸 원하니까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잡아 올 수밖에 없고 이쁜 여자 다 골라가도 모자라니까 얼굴을 개조해서라도 이쁘게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방 거기서 술 먹고 여자랑 놀아나고 와서 신문 보고서 “쯧쯧쯧”하는 것 아닙니까!
상당한 보응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딸들과 아들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학교에 보내서 좋은 집과 사돈관계 맺자.’
저의 집사람이 저의 집사람이 저의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 그 따위로 공부해 가지고는 나중에 장가도 못가. 이쁜 색시 얻지도 못해.”
그러자 우리 아들이 뻔뻔스럽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습니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우리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순 엉망입니다.
새벽기도 오는 여자를 납치하려고 봉고가 쳐들어오는 시절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안 일어나서, 내가 아는 사람에게 안 일어나서 그렇지 한 다리 건너서 일어나면 “그러게 밤길은 왜 다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마누라가 잡혀가고 딸이 잡혀가야 눈이 나올 텐데 아직은 거기까지 사태가 안 와서 여러분은 웃고 있는 것입니다.
큰 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이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자기를 잡아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런 성적인 쾌락을 구하고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는 이 일에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벌입니다.
사람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만큼 큰 벌이 없습니다.
잘못한다고 옆에서 아무리 눈총을 주어도 모르고 말을 해도 모르는 것만큼 안 된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엔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같이 유학을 온 한국 학생들 중에 미국에 와서 뻔뻔스러운 것을 배운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자유분방하다, 개인주의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지키는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 하나만은 잘 지킵니다.
‘도서관에서는 무엇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은 규칙입니다.
그 말을 유일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유학생이었는데 워낙 개판이라서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둡니다.
제가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와서 오렌지를 까먹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는 먹어도 괜찮데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더니 담당 사서에게 가서 “나 오렌지 먹는다.”그랬더니 그 사서가 웃으면서 “먹어라”그랬습니다.
그것이 욕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욕인 줄 모르고 그것이 자기를 인간 취급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벌입니다. 큰 벌입니다.
우리는 돈 벌고 물질을 채우는 욕심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졌습니다.
수치심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많은 부인네들이 집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돈벌이를 시작했습니다.
증권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여기저기 많은 일들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은 여인들을 향하여 무능하다는 이유로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생긴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증권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벌자 월급 백만 원 벌어오는 남편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이 깨졌죠.
부인이 돈을 벌므로 남편이 무능해지고 가정이 깨진다면 그놈의 돈, 없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습니까?
부인의 가치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 오느냐에 있지 않고 가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있습니다.
아내는 모름지기 정숙하고 현숙하며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으로 어떻게 알뜰살뜰하게 잘 사느냐가 그 아내의 가치요, 훈장이요, 명예이지 돈을 얼마나 잘 벌어오느냐가 아닙니다.
껌 짝짝 씹어 가면서 선글라스 끼고 하얀 자동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모님, 사모님 소리 들어가면서 통장에 몇 억씩 넣고 있는 것이 자랑이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 모르고 구역공부에서 떠드는 그런 일이 교회까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구역공부 시간에 성경과 교재를 제쳐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8절에 있는 말과 같이 버려둠이라 하더라도 조금 다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상실한 마음’, 정확히 이야기하면 ‘실성’했다고 그럽니다.
완전히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미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밑에 나오는 것 불의, 추악, 교만,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능욕, 능욕, 교만, 자랑,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그런데 이 실성한 것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어서 더 큰 일이냐 하면 무자비해진다는 말입니다.
큰일입니다.
미친 자가, 악한 자가, 힘이 세면 그것이 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쳤으면 우리말에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미치려면 곱게나 미치지, 미치려면 힘이나 없지 그럽니다.
미친 주제에 힘도 있으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여러 나라 중에 교육열이 가장 높고 시대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치열한 경쟁력 가운데 살아남은 용감무쌍한 자들입니다.
얼마나 유능한 미친 자들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자비합니다.
우리 생애 전반이 그렇습니다.
일단 정치가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욕할 마음은 없습니다.
개인을 욕할 틈이 없습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다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나라는 누구를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중에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의 모든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뇌도 바꾸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가서 죽으면서 뇌를 보관해 놓았다가 뇌를 바꿀 때 정치를 하던 사람의 뇌가 가장 비쌀 것입니다.
왜요? 거의 신품이라는 거죠.
뇌를 써 본 적이 없다는 거죠.
정치라고 해서 도무지 그 사람을 정치가로 만든 국민들과 그를 뽑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가를 욕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바보, 멍청이인가, 실성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는 신자들마저도 그것을 부러워한다는 데 있습니다.
정치가들만큼 이해관계가 얽혀서 거짓말을 떡 먹듯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합니다.
어제까지 동지였다가 다음날 적이 됐다가 다음날 또 동지가 되었다가 이것이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것을 꿈꿉니다.
그것이 벌인지를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25절 보십시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5)
하나님을 놓치면 그렇습니다.
28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저희가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므로 내어 버려두는 것입니다.
내어 버린다는 것은 보호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호는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보호란 순종의 보상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만이 보호를 받습니다.
그럼 유기된 자는 무엇입니까?
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과 진리와 복과 영생이 있음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부패, 당연한 결과인 더러움, 수치스러움, 악함으로 자기를 온전히 다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벌인 것을 아셔야 됩니다.
학교 가지 않고 땡땡이 친 것, 자체가 벌입니다.
아내를 놔두고 외도하는 것은 스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릴이 있지, 재미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혼동하지 마십시오.
스릴이란 아슬아슬하다는 뜻이지 재미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슬아슬하다는 것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재미있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육연발 권총 속에 총알을 하나만 넣고 죽음의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총알이 그때 있으면 죽는 것이고 없으면 사는 것입니다.
스릴 있죠? 그것이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그러는 사람을 능력 있고 담대하다고 그럽니다.
‘미친 놈 염병한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부러워해서 눈알이 빠진 신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예수만 안 믿었어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있다 믿는 것인데.......
벌인 줄을 모릅니다. 벌입니다. 벌!
그들은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담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었고 썩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우리가 부러워합니까?
세상은 자기네끼리 미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 우리의 정당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저들에게 보상받으려고 하니까 여러분은 그토록 많은 혼돈과 그토록 많은 유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가시면 역사상 이미 일어났던 하나님이 심판의 대표적인 사건인 노아의 홍수,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가 지금 본 바와 똑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1-6)
당시에 부패상이 무엇인가,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해서 일어난 결과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저들의 죄악을 가장 두드러지게 증거하는 것이냐고 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더 이상 경건한 하나님의 부름의 축복의 장으로 삼지 않고 눈에 좋은 대로 골라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자녀들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결혼하신 분들이 있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그렇게 결혼시키려고 하시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이 첫 번째 조건입니까?
저 사람과 사돈을 맺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을 줄 것인가 하는 사회적인 체면과 이익이 여러분들의 계산에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의 아들,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합니다.
무슨 과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학교냐가 문제입니다.
또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신성한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은 관계로 부름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성적인 대상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늙어서 부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남편이 밖에서 혹 젊은 것들에게 침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있는 대로 돈을 모아서 주름살 펴는 수술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부 이마로 잡아 올려 가지고 주름살을 제거하는데 몇 번 받으면 배꼽이 턱에 와서 붙는다고 전문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서로 욕을 합니다.
저것도 수술한 것이고 저것도 수술한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다면 여러분도 할 것 아닙니까?
배우들은 일본에만 갔다 오면 얼굴이 바뀌어져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광대뼈가 낮아지고 코가 오뚝해지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이 그 얼굴에 침을 흘리는 것만큼 부인도 말없이 남편 몰래 계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되고 얼굴 성형 수술을 위한 2억짜리 계 이런 것들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예뻐지면 유혹의 손길이 다가오고 꼭 남편하고만 살 필요가 없어지고 배짱 좋게 이혼하고 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창세기 4:19에 성경이 가인의 족보 속에 이미 기록해 놓은, 인류가 단연히 맛 볼 결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16이하에는 가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5장에 오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오지만 이미 그 전에 가인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19절에 라멕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지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나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도다 하였더라” (창 4:19-24)
이 라멕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거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시를 쓰고 있는데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그런 소리를 아내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찔렀기 때문에 내가 그를 죽였고 나를 욕되게 하는 자는 소년이라도 죽였다.
여기서 소년이라는 것은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힘센 청년을 의미합니다.
누구라도 나를 건드리고 나를 모욕하는 자는 내가 죽이고야 말겠다.
하나님이 가인을 건드리면 칠 배나 벌을 주겠다고 했지만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칠십칠 배나 내가 복수하리라.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벌이라는 것을 지금 모르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살아야 되고 전전긍긍해야 되고 모두를 원수로 돌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랑을 누구한테 밖에 할 수 없느냐 하면 자기 아내들한테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어떤 센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의 아내를 자기편으로 만드는 수를 제일 많이 썼답니다.
내가 A라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너무 힘이 세면 그 A라는 사람의 부인을 유혹해서 그를 통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는 방법을 썼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들을 모아 놓고 큰소리를 쳐야 되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칠십칠 배나 원수를 갚겠다고 누구한테 떠듭니까.
자기 마누라들을 앉혀놓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세 살 난 딸아이를 앉혀놓고 “아빠 힘세지”하는 거나 무엇이 다릅니까?
이것은 못난 짓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내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는 아다고 하나는 씰라인데 아다라는 이름은 그 의미가 이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인 하나는 이뻐서 얻었고 씰라라는 이름은 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는 성적인 쾌락을 위하여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혼의 시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둘이 한 몸이 될 지라’ 하고 축복했던 그 모든 신성한 결혼과 행복한 가정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아마 힘으로 빼앗았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나를 건드리면 칠십칠 배로 갚을 것이라고 자기 아내들에게 고함을 질러야 되는 일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스스로 옷 입고 살고 있고 더러움 속에 방치되어 썩고 있으나 스스로 그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벌을 받고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거룩을 행하며 자기의 욕심을 구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자기의 생명력을 무성케 할 뿐 아니라 죽은 생명에게도 생명을 전달하며 다른 사람의 감겼던 눈을 뜨게 하는 이 복된 일은 신자들에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신자란 무릇 그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명의 기운과 생명의 생명 된 모든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보상을 삼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상당한 보응을 하고 계십니다.
저들은 자유롭지 않으며 저들은 용감하지 않습니다.
저들을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며 저들은 자기들이 어떤 수치와 어떤 더러움 속에 방치되어 있는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얻은바 복을 놓치지 마시고 행여나 잠시 미쳐서 세상 사람들의 미친 것에 따라가지 마십시오.
감사하는 자 되시고 여러분이 얻은바 구원을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인생이, 주를 의지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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