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0강(롬 6:11),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제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아직도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영광과 거룩의 자리로 나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서 신자가 기억해야 할 두 국면을 소개하여 신자 된 기쁨과 신앙생활에서의 도움이 돈독해지기를 권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였습니다.
물론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서 또 구원의 차원에서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 죄가 우리를 요구하고 우리에게 죄를 공급했던 것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공급하시며 영광의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7).
여기 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현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어떻게 포도가 열리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가지 끝에 포도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달고 있을지언정 나무로부터 생명이 와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붙어 있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 포도나무 된 우리는 주님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결실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거룩한 것과 영광 된 것을 결실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성도들 마음속에 있던 불경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처음 평안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를 믿는 동안 내내 어쩌면 이러한 패배하는 고달픔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 경건해지고 더욱 영광스럽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주님과 우리의 연합은 좀 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엣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성경에서 쓰는 교회라는 표현의 의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곧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23절을 잘 봅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충만이니까 이 충만은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23절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 충만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없으면 충만하지 못하시다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충만하시지 않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십니까?
상당히 빈약한 비유로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천국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머리만 가 계시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천국 자리에 함께 앉기까지 그는 충만치 않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면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과의 풍성이 무엇이면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7-20).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복 주심의 능력과 의지 가운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복은 근원이 되게 할지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복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열심과 모든 능력을 가지심을 나타내는 말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의 인생을 살면서 혼자 책임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죄를 애써 거부하고 애써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옳은 것이므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여기서 실패라는 것이 삶의 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길은 자신의 손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의미로 인해 성도가 방자히 살라는 의도는 아닙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 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사 9:1-5).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고 약속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에 구원이 약속됩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7上)를 근거로 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십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下).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시기로 결심하셨고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우리 편을 들며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를 복되게 하시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정성을 기울이기로 하신 존재,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의 위치입니다.
우리의 얻은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두 국면에서 분명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를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시키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가 부활했을 때 하나님을 대하여 살았고 그의 승천과 함께 우리는 하늘 보좌 우편에 함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안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가 실제로 천국에 가지 않은 것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를 천국보좌에 앉히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와 연합시키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은 이미 우리에게 다 일어났고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은 언제나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명백하고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여태껏 일어난 것이 성취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 약속한 천국에 앉히고야 말일을, 그분의 열심과 성의와 능력을 다 동원하여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결국 구원의 확증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 편인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아들을 아끼지 아니했는데 무엇을 아끼시고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된 신자의 현주소입니다.
이 두 국면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의 신분과 위치와 삶과 우리의 자랑들을 확인합시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들은 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대하여 살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삶의 영역이 바뀌어진 것과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영역에서 죽은 저 세상의 것들을 탐합니다.
그것은 마치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에굽 땅은 벗어났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광야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살 때 그 생활이 애굽의 종살이와 비교해서 결코 낫지 않습니다.
실제로 광야생활을 성경에서 읽어보면 내내 이런 불평이 있습니다.
“애굽에 살 때는... 참외도 먹고, 부추도 먹고, 무엇도 먹고, 무엇도 먹었는데 여기는 아침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이것밖에 없다”는 불평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면서 불평을 합니까?
종 되었던 애굽과 자유인이 된 광야생활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종 되었던 땅을 벗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는 애굽 땅보다 무엇이나 더 풍성하고 자유로운 내 땅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으면 종은 아니지만 부유한 게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지금은 뚜렷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는 의미 속에서 보다 폭 넓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를 우리의 가시적 현실과만 비교하는 신앙태도를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것도 할 수 있다, 저것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지금 사도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고 빌립보 교회에서 위문단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 속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고달픈 것입니다.
바울이 물질로 좌우되지 않을 수 있음은 능력 주시는 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내게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배부름, 세상의 풍부가 내 힘이 아닙니다.
즉 궁핍하게 만드는 것과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 나를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쇠약해진다면 그것은 주님이 문을 닫을 때일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자들의 약점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의 영역에 살고 있으나 실상 모든 소원은 아직도 저쪽 세상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 다른 것은 다 좋습니다.
이 딸자식 하나 시집 좋은데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막내 학교에 붙여 주십시오.”
모든 소원이 옛날 우리가 손을 끊었던 세속 영역에 가 있습니다.
물론 시집 잘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학교 붙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소원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필요한 힘이 주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다면 소원과 자랑도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자들은 영적이지 않은 일에 아우성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만나보면 보통 목마른 것이 아니고 보통 굶주려 있지 않습니다.
아사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먹으라는 것은 다 싫다고 거절합니다.
뭘 달라는 것입니까?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제목들이 뭔가 써보십시오.
모두 저쪽 나라 세상의 것들입니다.
신령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하여 그토록 속을 앓고 있지만, 그것은 공부 못한다고 속상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는 부모는 없다는 사실이 심각합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목마름이 없으며 우리는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주께 오는 자는 다 그렇습니다.
주께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요 6:36-37).
우리는 주를 인하여 사는 자입니다.
빌립보서 4:13과 같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주님만이 내게 힘이시므로 거룩한 것과 영원한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 이외에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도둑질하는 힘을 주시지 않고, 포카 할 때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쓸모없는 일들을 소원할 뿐, 주로 인하여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요구하는 것은 저 나라에 있는 것, 끊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가서는 안 되는 그 영역의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이 약속은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습니까?
바울을 예로 듭시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고 감옥밖에 자유인들이 도우러 왔을 때 누가 더 부유하게 가진 자 입니까?
그것은 그가 칭찬하는 내용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와서 잘했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너희가 주의 사랑에 동참했으므로 내가 칭찬하노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이 고통까지 감수하고 있으니 바울은 강한 자였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을 찾아온 빌립보 교인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면회할 때 입회한 로마 군병이 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4장의 수가 동네에 이르러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있은 이후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27-34).
이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가장 큰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 인생 속에는 한 순간도 헛된 시간, 빈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시간만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순종하고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순간마다 이런 일이 연속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우리 영혼의 만족한 포만감을 누리는, 승리와 감사와 찬송을 영원토록 빼앗기지 않으며 어느 한순간도 쉬지 않는 일생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키우는 모습에 불만이 있습니다.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안 키웠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요즘 젊은 부모님들은 옛날 부모님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희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부모님들은 즐겨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먹을 것 먹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너 공부시켰다”라고 회상하십니다.
요즘 부모들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도 돈이 남아서 얼마든지 자녀 교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부모님들보다 지금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위하여 똑같은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본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맛있는 것은 자녀에게 주었지 부모님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맛있는 것은 자녀를 먹이나 더 맛있는 것을 먹을 돈이 부모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불행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자녀들은 부모님들이 그들을 위하여 돈 쓰는 것은 보지만,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반성하십시오.
우리가 자라면서 본 부모님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권위였습니다.
실제로 희생을 했고 실제로 우리 편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굶으셔도 자녀들은 배부르게 하고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은 다 참아도 자녀들이 갖고 싶다는 것은 다 해주었습니다.
희생을 하시면서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부모님들에게 희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부모님들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던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낙이며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신자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죄 아래 있었을 때 자신만을 위하여 살고, 자기를 자랑코자 이웃과 늘 전쟁상태에 있었던 참담한 기억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살거나 왕이 되기 위하여 살 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평안을 찾고 거기서 복된 것을 얻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되고 주님이 전면에 나타나셔야 됩니다.
그것은 억지로 요구되는 책임이 아니라 그것이 자랑이요, 기쁨이요, 복입니다.
신자로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실제로 필요한 것은 모르고 쓸데없는 데에 가서 시간을 허비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답게 영광과 특권과 승리와 자랑을 놓치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누리십시오.
성경이 약속한 것 같이 결코 목마르지 않고 결코 주리지 않는 이 영원한 삶의 승리와 자랑들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열매 맺는 일에 방해할 것이 이 세상에 없음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아름다운 찬송과 그 놀라운 기록들이 여러분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싫든지 좋든지 신자들이 살아갈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거부하면 손해를 볼뿐입니다.
그 길의 참 가치를 빨리 알 수 있도록 여러분은 기도하셔야 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가셔야 되고 영안이 열리도록 지혜로워져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이되 행복을 위하여 이 길을 따르셔야 됩니다.
지혜로운 신자로서 앞에 놓인 이 복된 길을 아무도 실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신자 되었으며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복된 길을 누리면 그 자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순종하는 신자들이 되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힘을 입게 하시고 허락된 것을 누리게 하시되 우리가 나오고 있고 끊어버린 저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말게 하시옵소서.
우리 힘이 주안에만 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갈 길이 하나님의 존전임을 알게 하사 우리로 주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열매 맺혀져 우리 입술에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고백들과 감사와 찬송이 동일하게 열매 맺혀지는 복된 신자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심령들을 지키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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