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에 관하여
삼위일체란 말이 비록 성경에 나오는 용어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신 한 분 하나님께 대한 편리한 칭호로 사용되어 왔다. 이 말은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3 '위'(位, 인격)가 구별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삼신(三神)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세가지 양태(樣態)나 세 부분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동격(同格)이시고 영원히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구약성경의 공헌점은 주로 하나님의 일체성(一體性)을 강조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여러분이 계신 것이 아니고, 또한 여러 신들 가운데 한 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며"(신 6:4), 다른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假定)을 일체 용납하지 아니하신다(신 5:7이하).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추호도 삼신(三神)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도 삼위일체에 대한 명백한 암시가 나타나 있다. 즉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신'이 자주 언급된 것과(1:2과 다른 여러 구절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언급된 것(23:23)을 볼 때 그러하다. 그리고 창세기 1:26과 11:7에서 복수형이 사용된 것과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이 복수형인 것과 그 현현의 성격을 볼 때 그러하다. 또한 시편 33:6에서 '말씀'의 중요성과 잠언 8:12 이하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볼 때 그러하며, 이사야 48:16과 같은 의미 심장한 구절과 유일신적인 맥락이 강한 곳에서도 삼위일체에 가까운 표현들을 찾아볼 수있다.
신약성경에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요일 5:7은 별개로 치더라도) 삼위일체에 관한 증거들은 지배적으로 많이 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와 같이 신약성경에서도 여전히 한 분 하나님으로 선포되어 있다(갈 3:20).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神性)을 말씀하셨고(요 8:58), 제자들의 경배를 받으셨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셨다(마 16:16; 요 20:28). '아들'로서 혹은 '말씀'으로서 그는 하나님과 동등시 되었고(요 1:1), 바울의 인사말에서와 같이(고전 1:3등)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언급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령 혹은 보혜사께서도 동등한 관계로서 나타나 있다. (요 14-16장 참조)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분명한 교리적인 언급은 없을지라도,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심에 대한 분명한 참조 구절들은 여러 군데 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도 이 삼위가 모두 언급되었으며(마 3:16, 17), 모든 제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되어 있고(마 28:19),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써 축복했었다(고후 13:13). 그리고 베드로전서 1:2에는 신자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과 성령의 거룩케 하심(성화)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사실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의 교리는 재빨리 교회의 신조로 받아들여져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특히 유일신적인 맥락 속에서 자연히 교부 신학의 일차적 관심사가 되었는데, 그 주된 목적은 한편에서는 삼신(三神)적 표현을 배제하려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군주신론적(君主神論的)표현을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충분히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체성은 하나님의 본질 혹은 실체가 오직 하나이시라는 표현으로써 확보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력히 주장되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선재성(先在性)은 인정하지만 그를 마지막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개별성이 강조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 삼위(三位)를 단지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자신을 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세 가지 양태(樣態)들에 불과하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저지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안에는 모든 영원성을 갖추신 성부, 성자, 성령이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많은 변증가들은 삼위일체적인 유추들을 일반적으로 자연에서와 인간의 구성 요서에서 발견해 왔었다. 이러한 유추들은 흥미롭기는 하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당한 이론적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가 아니시라면 하나님 안에 아무런 교제와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이 삼위일체 안에는 '교호 관계'(交互關係)가 존재하여, 완전하신 삼위 하나님께서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와는 별도로 영원하신 행사와 표현에 있어서 '서로 관계하신다'는 것이다.
합리주의자들은 삼위일체를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반대를, 그들이 창조주를 피조물의 용어들로서-즉 하나님의 일체성을 수학적인 일체성으로써-해석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단호히 분쇄할 수 있다. 그보다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배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과 성경 속에 확증해 놓으신 하나님의 행사들을 통해서 배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이해가 안되고 분석이 안 되는 신비스런 내용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컨대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역 속에서 한 분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해야 한다'.
단일신론(독재론 monarchianism)
이것은 초대교회 때 하나님 주권을 통일성(단일성)을 보호하려던 주장의 특성을 고려하여서 지칭하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물론 삼신론(三神論, tritheism)이 아닌 성부. 성자. 성령을 인정하는 한법적인 단일신론이었다. 그러나 이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서로 배타적으로 융화될 수 없는 두 종류의 단일신론이 생겨났다. 그 하나는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Theodortus와 연결되며 아마 Paul of Samosata와도 관련이 있으리라 본다. 이들은 삼위일체적인 각도에서보다 기독론적인 방향으로 접근하여 하나님과 같은 격으로 높여진 사람으로서의 성자의 우위성을 가르침으로 삼았다('양자론' 항목 참조). 또 다른 하나는 양태론적(樣態論的) 단일신론으로 Noetus, Praxeas, Savbellius 등에 의해 대표된다('사벧리우스주의' 항목 참조). 이 견해는 그리스도나 성령의 완전한 신격을 부인하지 않으나 그 둘을 단지 한 하나님의 양식이나 기능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 안에서 고통을 받으셨다('성부 고난설' 항목 참조)고 주장하며, 성부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내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텨툴리안(Tertulliammn)의 혹독한 비평이 가해졌는데 Praxeas는 성령의 사역을 패주시키고 성부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이다.
유니테리언 주의
이 고대의 이단은 일찌기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에서 기원했다. 이 아리우스(Arius)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교회의 장로로서 그의 이름으로 일컫는 사상 체계를 주장했었다. 아리우스는 삼위일체의 정통 교리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은 성부가 아니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가 아니신 때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점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일종의 신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경배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부와 동일 본질(同一本質)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이 고대의 다소 고등한 형태의 단일신론은 325년의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정죄되었다. 중세 시대를 통틀어 전반적으로
단일신론은 어떤 형태든지 이단적인 주장으로 간주되었다. 이 단일신론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의 저서들에서 다소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났으며, 재세례파 중 더욱 급진적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단일신론은 라엘리우스 소시니우스(Laelius Socinius)와 파우스투스 소시니우스(Faustus Socinius)등의 소시니주의(Socinianism ; 해당 항목 참조)에서와 1605년의 라코비안 교리 문답(the Racovian Catechism)의 신학적 기초로서 받아들여졌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정통 교리는 부인했지만, 일종의 초자연주의를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신적인 존재로 경배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적인 성품은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의 타락에 대한 정통적 교리를 부인하고, 인간이 타락 후에도 여전히 완전한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십자가에서의 그의 대속적인 죽음에서보다 그의 생애와 교훈에서 찾으려 했다. 계몽 운동과 자연신론(해당 항목 참조)의 영향으로, 단일신론은 더욱 더 급진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후기의 지도자들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데오도르 파커(Theodore Parker)는 위리엄 엘러리 채닝(William Ellery Channing)이 남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던 그 잔존한 초자연적인 내용도 배제해버렸다. 현대의 단일신론은 더욱 더 인본주의적인 내용이 되었다. 1825년에 창설된 미국 유니테리언협회(the American Unitarian Association)의 많은 회원들은 자기들의 운동이 기독 교회의 한 부분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59년에 그들은 '보편구원설자들'(the Universalists)과 병합하기로 가결했다.
성부 고난설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의 한 형태가 A. D. 200-250년 경에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아스(Praxeas), 보스트라의 베릴루스(Beryllus of Bostra)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이에 대해서 히폴리투스(Hippolytus),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이 차례로 답변했다. 프락세아스가 빅토르(Victor) 주교에게 몬타니즘(Montanism)을 추방하고 성부 고난성(聖父苦難說)을 받아들이도록 설득시킴에 대해,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프락세아스는 "성령(Paraclete)을 추방시키고, 성부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다.
성부 고난주의자들[Patripassianists; 라틴어 pater(아버지)와 passus('고난당하다'를 의미하는 patior에서 파생된 것)의 합성어]은 양식적 독재론자와 더불어 삼위일체의 3위(三位)를 혼동했으며, 그리스도의 한 인격(一位)안에 두 본성(本性)이 연합되어 있음을 부인했다. 그들은 일신론(一神論)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이시기 때문에 3위가 있을 수 없고 3가지 양식의 현현(現顯)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자는 성부가 인간의 양식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에투스는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는 성부였는데, 성부가 탄생하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성부 고난설이란 명칭이 명명되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성부로 어떤 때는 성자로
또 다른 때는 성령으로 양태만 바꾸어 나타나신다는 이론이 양태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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