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마서 26강(롬 3:21-24),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로마서 26강(롬 3:21-24),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구원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모든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인가 하는데 대한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하는 데에 이제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도행전 16 : 30에 있는 말씀으로 지진이 나서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옥문이 열리게 되었는데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간수와 죄수들은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다가 바울과 실라의 저지를 받고 그 앞에 엎드려서 묻는 장면입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 : 30 - 31).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척 복합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이렇게 쉽게 해결하지 마십시오.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맞습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라고 쉽게 속단은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훨씬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으로 가시면 바로 이런 반대 구절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 : 47 -48).
우리는 여기서 걸리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이 내 구원을 가능케 하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고 책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느냐’라고 꼭 집어서 말을 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 때문에 전도라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행 8 : 29 - 31).
전도란 무어냐?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설득하는 것이라는 식의 오해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느냐 할 때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다’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으면 되느냐?
아니 입도 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누워만 있으면 감이 입을 벌리고 들어와야죠.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다.
우리의 요청이 있거나 그 구원을 가능케 하는 요소로써 우리의 어떤 조건도 거기에 포함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보고 믿으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고 저 사람은 믿지 않아서 구원을 얻지 못 했다는 것이 맞느냐?
그러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으며 어떤 면에서 틀리느냐?
그것을 오늘 분명히 해야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일종의 절충안입니다.
내가 믿지만 이 믿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설득시키는 작업으로, 전도가 있게 해서 나를 믿게 하는 것 아닌가, 가능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전도냐 하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이 여기 사도행전 8장에 있는 바와 같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가서 그 읽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서 그를 설득시키는 방법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전도라는 것이 왜 등장을 하였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니까 이 세상이 지혜로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알지 못하니까 전도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 : 1로 가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경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 5).
전도가 설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스스로가 말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나타남, 이것이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고넬료 집에 가서 전도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 : 42 - 46).
말씀을 전할 때에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이 납득하고 항복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찾아온 것으로 고넬료 집에서의 전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찾아가시는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은혜와 선물이 한 죽은 심령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4 : 12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런 힘으로 찾아오시는 법이지 인간의 생각을 깨우고 도를 깨우치는 설득의 작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로마서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능력적 차원에서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허락된 은혜가 복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구원을 우리가 꼭 깨우치고 납득해서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필요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율법으로 족했을 것입니다.
율법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설득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등장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예수를 믿는 이 믿음,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구원을 이해하거나 결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하느냐?
또 다시 다른 면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되느냐라는 책임 문제가 걸립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로 합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 : 37 - 40).
이 양면성을 보십시오.
첫째는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입니다.
은혜가 강조된 측면입니다.
인간의 결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39절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양면성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라는 이야기와 스스로 찾아오는 자 두 부류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 다 한 부류입니다만 그 본인이 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이 둘 중에 하나로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합시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라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둘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데 한 사람은 자기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입은 바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쪽이 먼저냐고 생각하는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냐? 이것은 어느 쪽이 먼저냐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순환논리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순환논리가 여러 가지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좋은 믿음을 가지는가?
어떻게 하면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좋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힘 있게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믿음을 갖고 싶다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100%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좋은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습니까 할 때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세요.’ 그러죠.
하나님께 120% 전폭적인 신뢰가 되지 않아서,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좋은 믿음을 구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겁니다.
또 하나의 순환논리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성경이 말을 해서 압니다.
그러면 성경의 증거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환논리입니다.
성경은 왜 권위가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왜 믿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권위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믿습니까?
성경이 증거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순환논리입니다.
그럼 이 순환논리가 왜 생겼습니까?
하나님을 증명하려면 하나님보다 더 큰 것으로 증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돈을 꾸어주고 돈 꾸어준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담보를 잡습니다.
그러면 담보와 꿔준 돈 중에 어느 것이 커야 됩니까?
담보가 커야 됩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하나님보다 더 큰, 더 확실한 무엇으로 증거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존재야말로 모든 사실과 진리와 가치와 권위에서 최고입니다.
그 최고를 그것 아닌 것으로는 아무리 갖다가 증거를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자리를 보려면 그것보다 높은 데 가서 보아야 꼭대기가 보이는데 제일 높으신 하나님을 그것보다 낮은 데서 아무리 올라가 보아도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든 경험이든 무엇으로도 그것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절대성을 증명키 위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순환논리가 생긴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순환논리의 고리를 풀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어떤 원리든, 어떤 내용이든 우리로부터 그 논리를 출발하거나 그 논리를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내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준이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대상이고 그 내용이며 우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존재냐 하면 모든 것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믿었다, ‘믿었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믿은 것이 믿음의 조건인 양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으로 가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 : 9 - 15).
구원의 조건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예수를 믿으십시오.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하여야 예수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14절부터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은 이를 어찌 부르리요 믿지 않고 어찌 주를 부를 수 있습니까?
듣지도 못하고 어찌 믿겠습니까?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는 자가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근거가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다시 하나님께로 갑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었다고 해서 나로부터 이 구원이 발생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들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구원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허락한 구원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내가 믿게 된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이 나타난 표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합니까?
나는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너는 안 믿으니까 구원을 못 얻는다.
이렇게 갈라섭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그러지 말고 구원 얻은 표라고 이야기하십시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었다. 아니요 난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시인하는 것이 구원 얻은 표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구원 얻은 조건으로 삼는 것과 구원 얻는 표로 갖는 것은 뭐가 다릅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조건으로 삼으면 그는 자랑으로 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사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1 - 9 ).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가지는 자의 특색은 그것이 자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난 믿었다. 그래서 구원 얻었다. 넌 안 믿었다. 그래서 넌 지옥가도 싸다. 이렇게 갑니다.
이것은 믿음을 조건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내가 만들어 낸 것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구원을 얻은 표지 구원을 얻는 조건은 아닙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매우 당황하시고 혹 이렇게 오해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면 결국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설치고 열 내고 예수를 믿으며 열심을 낼 필요가 있는가?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 중에 한 분이 신유의 은사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으셔서 기도를 하는 대로 사람이 낫는 겁니다.
그런데 같이 믿는 젊은 그룹 중에 한 분이 그 친구 분에게 네기 지금 받은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이 선배가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냐.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려고 2년을 방황했습니다.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요나서 2 : 4로 답을 얻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할지라도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리라.”
거기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선배가 가졌던 믿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가 풀린 것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이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은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봉사를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주고받는 식의 신앙 관계인 적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내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신앙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분이 그때 무엇을 발견했느냐 하면 이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사탄이 주신 것이냐 하는 은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사탄에게 속한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고민하다가 드디어 발견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느냐’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질문을 해 봅시다.
여러분이 주일날 아침, 화창한 가을날 어디 놀러 가지 않으시고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오시고 돌아가서 저녁에 주무시는데 밤에 환상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무개야 너는 내가 구원을 한 백성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너는 이제 죽으면 지옥 갈 건데 네가 하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하니까 민망해서 너한테 알려 주러 왔다. 넌 이제 죽으면 지옥 갈 것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맘대로 잘 살아라.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구, 큰일 날 뻔했네 하고 이제 나가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제멋대로 살다가 떳떳하게 지옥을 가시겠습니까?
저는 그때 이 질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 주었느냐 못해 주었느냐 하는 개인적인 것을 떠나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하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은혜 속에 있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답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하시지 않는 것은 제 죄로 인하여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을 부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지옥을 가도 살아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실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어디서 틀리고 있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서 그 보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지 마시고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은 이제 내가 예수를 알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회개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아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내가 주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우리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믿습니다.’라는 이야기는 우리 하나님이 누구인 줄을 알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인합니까?
그거야말로 내가 구원 얻은 가장 분명한 표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얻는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내가 구원 얻은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은혜로 이해하지 못하셔도 좋습니다.
당신 예수 믿는가? 믿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확신하는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100점입니다.
저는 그것을 거부할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확인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얻은바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운가가 여러분에게 확인되어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더 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은혜가 강조되어 책임이 외면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그러면 내 신앙고백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을 내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내 책임이 강조되어서 신앙고백과 주를 믿는다는 결단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은혜가 망각되는 것이라면 그것도 또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순환논리에 필요성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순환논리를 여러분 좋게만 갖고 계시지 마십시오.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이해를 하신다면 이 순환논리가 갖는 풍성함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혹 아직 단순하다면 여러분은 조금 전에 로마서 10장에서 본 바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좀 더 풍성하게 들어가 보십시오.
믿지도 않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들을 수 있습니까?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되리요.
그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아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주를 붙잡는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구원을 이루사 내가 이제 주님이 누구인 줄 알고 기쁨으로, 간 간절함으로 나의 큰 영광으로 알고 그를 붙잡은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마르고 가난한 신앙이 아니라 훨씬 풍성한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주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결과인지 알면 여러분의 입술에 자랑이 있지 않고 감사와 찬송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실제적으로 누려야 할 가장 큰 특권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놓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 가 믿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반문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내가 어떻게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것을 밝혀내십시오.
이런 성경구절들이 공연히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 : 3 - 6).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가 이미 은혜와 선물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한 번 붙잡으신 하나님은 손을 절대로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혹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것이 여러분의 손, 여러분의 의지, 여러분의 결단에 근거한 것으로 가난하게 위태롭게 갖고 계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산물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인식하셔서 마음 편히 풍성하게 기쁨과 감사 속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