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마서 32강(롬 5:20-21), 율법의 기능
로마서 32강(롬 5:20-21), 율법의 기능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라.” (롬 5:20-21)
이 시간에 생각해야 할 말씀은 로마서 5장의 마지막 부분,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加入)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하는 이 표현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아심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면 ‘율법을 주어서 죄를 더 많이 짓게 한단 말인가?’ 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먼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16로 가 봅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것은 이미 구원을 생각할 때 누누이 강조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면, 최소한 율법은 정죄의 방법입니까?
그러나 율법은 정죄의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로마서 5장을 살펴보면서 확인한 것은 율법이 들어와서 정죄가 되고 그 다음에 사망이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 사망이 왕 노릇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2-14).
분명히 사망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들어왔느냐 하면 12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죄의 방법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와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면 구원을 얻고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을 베풀지도 않고 정죄를 베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당한 것은 율법이 있기 전에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이 이미 인류 위에 왕 노릇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도 아니고 정죄를 위한 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도대체 ‘율법의 가능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당연한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냐’고 할 때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있는 말씀같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하는 성경의 답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답은 답이기는 커녕 우리에게 더욱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냐? 그리고 왜 주셨는가?
그리고 그것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합당한 말인가? 하는 것을 이제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은 분명히 ‘죄에 대한 지식’의 증가를 위하여 준 것입니다.
죄를 규정하고 ‘이것이 죄다’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으로써 율법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로마서 3:19로 가시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의 기능 중에 가장 큰 기능이 무엇이냐면 쥐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7로 가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 하였나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죄를 규정하고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이 그 첫 기능입니다.
죄를 규정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죄다, 이것은 아니다’이런 판별은 됩니다.
그래서 우리기 자금 읽는 로마서 안에서도 4:15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라는 표현, 5:13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표현들을 이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다’라는 규정을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15이나 5:13에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라든가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그래서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이 들어와야 죄가 비로소 죄로 인정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기 전에는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등인지 모릅니다.
시험을 보면 누가 꼴등인지 누가 59등인지, 누가 60등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험을 봐서 석차가 나오지 않으면 누가 58등인지 누가 59등인지, 누가 60등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을 봐서 그 시험이 학생의 실력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까?
원래는 20등 짜리인데 시험이 그를 59등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보지 않으면 어쨌든 본인이나 부모님이나 ‘그저 그래도 중간쯤은 하겠지’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죄를 드러내는 것과 없던 죄를 만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은 이처럼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몇 등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식으로 하면 율법이 있기 전에는 범함을 없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범함이 없다는 것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라는 것, 등수가 매겨지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지 그가 죄를 안 지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죄인이었다.’ 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죄인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적해야 되느냐 하면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죄를 더 짓게 한다는 말과 지금 설명된 것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우리가 몇 등인지 밝히는 일을 그 첫 번째 기능으로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이 죄 인지를 규정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줍니다.
율법은 죄의 본질이 죄를 짓는 한 인간이 외부로부터의 강압과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좋아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합니다.
로마서 7:7로 가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 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 하였으리라.”
여기서 먼저 죄에 대한 지식을 율법이 얻게 합니다.
그러나 8절 “그러나” 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7-13).
보십시오. ‘이것이 죄다, 이것이 죄가 아니다’ 이것을 밝히면 인간은 곧 생각하기를 “죄가 무엇인지 알면 나는 절대 그것들을 짓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율법이 들어와서 이것이 죄고, 이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준 이후에 우리가 죄를 죄 인줄 알고도 그 죄를 짓더라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곧 없어질 것을 알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세상의 것을 탐내면 안 되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모순과 허구는 정답을 아는데 정답같이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가 스스로 애통해 하는 것이 그것이고 남한테 욕을 먹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돈으로 키우고 신앙으로 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거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알아도 그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요.” 이 따위로 대답을 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글을 써서 액자에 걸어 놓는 것, 아무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무서울 것이 없고 부러울 게 없는 자들이고, 죽어도 괜찮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안 죽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살아서 뚜렷이 해야 될 일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오래 살려고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만날 준비를 못한 것을 자기가 알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오래 버티느냐고 물으면 아직 회개할 것이 많아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시간을 주면 그 시간은 세상을 위해서 살고 다시 물어보면 또 아직 못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시간을 전부 무엇으로 바꾸어 섰습니까?
세상에서 즐기는 데 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죄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죄가 나의 주인이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를 떨쳐버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틈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석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롬 7:8上)
“그러나 죄가”에서 주어가 죄입니다.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위협하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것인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아는데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나에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 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 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율법이 선한 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실력이 우리에게 없고, 아니, 그 소원이 있어도 그것을 행사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나를 주장하고 있고 죄가 나의 상전이요 나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확인합니까?
율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가지고도 죄를 짓는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분명히 무엇이 죄며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가를 밝히려고 온 것입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알린 것인데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신령한 쪽으로 사용하질 못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그 역사를 통하여 증명한 것입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좋은 것을 하려고 해 본 역사가 없습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인류의 문명이 가장 발달하게 된 모든 계기는 모두 전쟁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더 많이 죽이고 어떻게 하면 적군을 더 많이 살상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 개발이 인류 문명을 발전 시켜왔습니다.
의학도 언제 가장 발전하느냐 하면 생물학전을 이루기 위하여 생체 실험을 하는 중에 많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독일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점령하고 나서도 일본의 많은 전범자들을 묵인해 준 것 중에 하나는 그 생체 실험의 결과를 자기네가 갖기 위한 보상으로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는 항상 그런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억압하고 압제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악랄한 방법을 개발하는 것으로써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명의 발전이 전쟁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까?
비행기가 무엇으로 인해 가장 많이 발달합니까?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드린 부문이 무엇입니까?
전쟁 무기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쟁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이 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자는 얘기입니다.
유엔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태껏 잘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상임 이사국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그 동안 세계를 주름 잡았던 로마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이제 일본이든 그 나라들이 언제 평화를 외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역사상 어떤 나라도 평화와 자유를 약속하고 실현한 나라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가진 자의 횡포에 겉만 포장하기 위한 번드르르한 예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 동안 쭉 피해를 입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도리어 우리가 힘이 있었더라면 일본보다 더 악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우리 민족은 일본민족보다 낫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다 똑같습니다.
불행히 우리는 연약한 나라에 태어났을 뿐이지 우리는 힘이 있더라도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에 나오는 사설이나 시론(時論)등에 ‘이 시대는 왜 이런가, 왜 세상이 이런가?’ 라는 글들을 쓰는 것은 헛된 것들입니다.
누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안 합니까?
우리는 알아도 안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때 친일파로 나라를 팔아먹고 거기 붙어살던 사람들이 아직도 경찰계나 법조계나 정부 관리들 속에 남아 있어서 우리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때 그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고 해서 오늘날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평등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연약할 때만 하는 소리입니다.
힘이 있으면 아무도 그 이야기를 안 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과 계약을 맺을 때 힘 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힘없는 사람에게 몇 개를 줍니까?
힘 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힘없는 사람에게 하나도 주지 않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그 나머지는 생색내는데 써야지 어떻게 없는 사람을 줍니까?
힘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있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나머지는 생색내는데 쓰고, 힘없는 사람은 굶어 죽어야죠.
죽는 그날까지 힘 있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한다고 생각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죄의 노예 된 인간의 현 주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많은 것들을 죄에 대한 지식을 피하기 위해 쓰지 못합니다.
우리의 거룩과 신령을 위하여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참 불행한 일 중에 하나인데 학교나 가정에서 성교육 같은 것을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걸 가르쳐 주면 어떻게 이것을 다루어야 되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 요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나쁜 쪽으로 먼저 머리가 굴러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고 재주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의학이 전쟁 중에 발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요?
생물학전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균을 퍼뜨리면 어떤 환경을 만들면 가장 크게 인간에게 손해가 되는가?’
어떻게 하면 치명적인 재난을 주는가를 연구하느라고 의학을 공부한 것이 의학 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했지, 어떻게 하면 사람 살리느냐라는 연구는 그렇게 집요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범죄자들이 어디서 범죄를 배우냐면 신문에 그 잘나게 쓴 신문 기사를 통해서입니다.
글쎄 어떤 악당은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아 이 자식은 바보같이 이렇게 해서 잡혔구나.
여기서 요렇게 하면 빠져나갈 것을” 이라고 깨우쳤답니다.
이것밖에 못 배우는 것이 신문입니다.
그래서 신문에다가 범죄 기사를 그렇게 크게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반성은 마땅히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답답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를 부모하고 의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친구하고 의논을 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를 왜 부모하고 의논하지 않고 친구하고 의논한다고 생각합니까?
부모가 어려워서? 이해를 안 해줄까봐? 그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자녀들이 갖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범죄의 냄새가 나서 부모에게 의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떼어먹는 이야기 아니면, 자기가 잠깐 눈이 맞은 어떤 여자하고 도망하는 이런 음모들이니까 부모에게는 의논하나 마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그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재미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의논을 하면 정당한 답을 해 주는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만 고만한 놈들끼리 자기가 해 보고 싶은데 기회가 안 왔던 것이니 해 보라고 그러죠.
“야, 뭘 망설여? 사나이가 그런 것 가지고. 도망가.”
그리고 어떻게 되나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거든요.
이처럼 아무도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생명과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조언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심사숙고하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밝힌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 자체는 신령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4-16).
율법은 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밝혀진 죄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준 정보로 더 깊이 더 많이 팔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결과 적으로 범법을 더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본문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죄를 더 많이 지으라고 주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디어 깨닫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요, 환경이 나를 위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죄가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뒤에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에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를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이 고백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죄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궁극적으로 어떤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느냐면 갈라디아서 3:21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1-24).
율법은 그런 의미에서 몽학 선생입니다.
몽학 선생은 무엇이냐 하면 옛날 계급 사회 때, 로마 시대의 주인집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하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몽학 선생은 말하자면 뭘 가르치는 선생은 아닙니다.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안내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한 일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죄를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가 사망의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의 회개를 동반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때 여러분은 감사와 함께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꼭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요, 율법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런 부작용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부작용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 부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작용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다” 하는 것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율법은 나와 상관없다”하는 식의 사고가 꼭 있습니다.
로마서 8:1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3).
율법은 분명히 신령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밝힌 것 중에 하나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율법을 따라 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8:2에 나오는 것과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가 구원을 얻었다고 외친다면 이제 신령하게 살며,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 신령과 거룩의 가장 중요한 안내서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무엇을 싫어하시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가장 큰 핵심은 마태복음 22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가졌던 죄의 핵심 되는 본질이 무엇이냐 그럴 때 자기 이외에 어느 것도 인정치 않는 이기심이며 모든 사람을 굴복시켜 그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의 욕심들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이웃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의 자리에 섭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율법을 통하여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매일의 삶 속에서 여러분이 과연 생명과 성령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지 확인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은 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요, 이 세상의 흑암과 불의와 횡포 속에 신자의 책임을 놓고 사는 것이 됩니다.
우리야말로 유일하게 생명을 전하고 위로를 전하고, 그리고 사람을 고쳐 낼 수 있고 의와 거룩을 나눠 줄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커다란 사명을 회피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 여러분에게 허락된 인생을 신자답게 살아서 여러분이 마침내 율법을 이루어 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 큰 특권들을 누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여러분을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 생명과 성령의 법에 동참하고 싶은 마땅한 갈증이 일어나도록 여러분의 삶을 이제부터 믿음 가운데서 지켜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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