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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37강(6:5-7), 죄의 몸

유승필 2008. 3. 1. 10:23
 

로마서 37강(6:5-7), 죄의 몸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5-7)



우리는 로마서 6장에 와서 구원을 얻은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 말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지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6:1에서 보았고 우리가 은혜로 얻은 이것이 죄와의 단절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죄로 다시 돌아간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그리고 죄의 영역과 통치에서 우리가 이제는 끊어졌다고 하는 것과 죄의 생각, 죄된 성품, 죄된 본성이 없어졌는가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신자가 된 이후에도 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고 죄에 대한 습성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신자가 어찌하여 죄에 대한 생각과 습성과 죄를 짓는 실패가 생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제부터 살펴보려는 5절부터 7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라는 것이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죄의 몸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학자들 간에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은 ‘죄의 신분, 죄의 영역에 속한 우리의 지위가 아니라 죄의 성품에 대하여도 죽은 것을 말한다.’라는 이들이 있고 저나 또는 성품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고 신분에 대하여만 죽은 것이며 여기 6절에 나오는 죄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성경 속에서 ‘신분으로서의 우리’와 ‘성품으로서의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0 말씀으로 가 봅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나 12절에 오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12절에 나오는 너희 자신과 11절에 나오는 너희 자신은 다른 것입니다.

11절에서의 너희 자신은 가장 핵심 되는 우리의 존재 근거들, 우리 존재의 존재되는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분으로서의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 죽을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너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할 때의 너희 자신은 앞에 있었던 신분으로 취급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똑같은 우리 자신이지만 ‘신분과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서의 우리 몸’입니다.


이 둘이 다른 것임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것은 죽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몸을,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냐면 우리 자신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운명으로서 우리’를 말하는 것과 ‘아직도 남아있는 옛 성품과 옛 습관으로 불안전한 우리’를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어느 일부는 저기에 속하였고 어느 일부는 아직 아닌 고로 나누어 있지 않고 이렇게 우리 자신을 두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분과 지위와 운명으로서의 우리’와 ‘실제로서의 우리’를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을 지금 성경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7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17에 가면 좀 더 두드러지게 나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7-24).


지금 사도 바울은 신자 된 우리가 두 마음, 두 법, 두 존재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를 향하고 거룩을 향한 열심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한다면 이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원래 죄를 짓느냐?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다.

이것은 아주 핑계를 대기 좋은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정확한 신자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기도 한, 매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진술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무엇을 보느냐 하면 우리가 분명히 죄 아래 있으면 더 이상 죄를 소원하지 않고 의와 거룩을 소원하는 사람으로 거듭난 나 자신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일어났고 새롭게 창조되었고 새롭게 허락받은 것이 내 온 전체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죄의 뿌리가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옛 성품입니다.

아직 완전해지지 않은 나의 일부요,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아직도 불안전한 자신의 어떤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과 지위와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였느냐 하면 성경 속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것과 이루어 나가실 것을 말합니다.

이룬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우리에게 확실한 우리의 운명, 영원한 약속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면 남아 있는 죄의 성품들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이 둘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남아 있는 죄의 성품이 곧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으로 볼 때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옛 성품과 나를 아직도 죄 짓게 하는 어떤 영향력들이 결국 나를 장악하거나 그것이 운명이 되고 결과가 되게 끌고 가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결국 의와 거룩과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으며 승리로 가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나누어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것으로 끝장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끝장납니까?

우리는 은혜와 거룩과 의와 생명으로 끝장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거나 우리를 끝장으로 가는 자리까지 영향을 주거나 우리를 장악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로마서 6:6로 돌아와서 이 표현을 다시 분명하게 정의해야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하는 말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의 신분을 이야기하고 죄의 몸이라는 것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 죄의 뿌리, 옛 성품을 가리키는 줄로 압니다.

성경 속에서 이 옛사람이라는 표현도 옛 신분을 이야기하지 않고 옛 성품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만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을 볼 때는 그 옛사람이 옛 신분이 아니라 옛 성품인 것을 봅니다.


이 죄의 몸이 멸했다는 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 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만 그 죄의 몸이 멸하고 옛 성품이 멸했다면 왜 다시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표현에 조금 오해가 있었고 우리말 성경이 정확한 번역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으로 가시면 똑같은 표현이 2:14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4).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표현에는 ‘없이 하시고’고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표현에는 ‘destroy'를 사용해서 멸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정확히 로마서 6:6에 있는 “죄의 몸이 멸하여”와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에 쓰인 멸망시킨다든가, 히브리서 2:14에서 보는 없앤다는 표현은 헬라어 원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없앤다는 표현이 아니고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없애는 것과 무력화시키는 것은 다릅니다.

마귀는 지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망 받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언제 멸망을 받느냐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주님께서 그를 무저갱의 영원한 불못에 던질 때에야 멸망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 순간에 멸망 받았다고 히브리서 2:14에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더 이상 마귀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지금 예수 안에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사단이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를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는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고 손을 대지 못하고 우리에게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를 속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공갈을 치고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는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 옛날 습관이 남아 있고 옛날 경험이 있어서 그가 공갈을 치면 꼼짝을 못하고 유혹을 하면 말려들어 갑니다.

지금 우리가 짓는 죄는 그런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우리의 인격 속에서 떠나갔습니다.

죄는 우리의 원리가 아닙니다.

아까 본 로마서 7장에서 표현한 것같이 우리의 마음의 법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를 좇고 거룩을 좇으며 생명을 좇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직도 우리 몸에 영향력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의를 좇으며, 생명을 좇으며, 진리를 좇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몸에 죄의 잔재가 남아서 기껏 마음속으로 옳은 일을 생각했다가도 금세 구부러지고 막히고 급기야는 죄가 원했던 것을 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지금 모습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24절에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2-23).

우리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언제나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생각입니다.

우리만이 의와 거룩과 진리와 생명과 영원을 따르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몸에 죄의 영향력과 구속이 남아 있습니다.

옛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집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24절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 24).

그런데 왜 감사합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그리고 늘 누가 이깁니까?

죄의 법이 이기는데 왜 감사합니까?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아무리 죄에게 진다할지라도 그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 통치 아래 들어가거나 죄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지, 우리를 죄의 통치 아래로 그의 소유로 다시 붙잡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지위와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그가 착한 일을 해도 착한 ‘죄인’인 것입니다.

신분이 죄인입니다.

신자는 죄를 지어도 나쁜 ‘성도’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이 두 다른 존재, 말하자면 우리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결국 하늘나라에 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고 그 옛 성품이 남아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8:10로 가 봅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0-14).

우리는 이 두 갈등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시험에 지고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의 자녀요, 그 신분이 바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이것이 이야기 하는 것, 죄가 우리 몸에 아직 영향력을 남겼다 할지라도 이 몸이 죄의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꼭 거룩한 생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몸뚱이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죄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몸입니다.


우리의 많은 본능 속에 죄의 영향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욕심, 자존심, 빈정댐,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육신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의 영향에 아직 더 많이 절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고치고자 할 때 먼저 생각을 고쳐야 됩니다.

생각을 고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고친 생각이 몸에 익숙하도록 해야 됩니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우냐 하면 김유신이 술 먹고 자기 말에 탔더니 천관녀의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텨도 습관이라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법칙으로 오래 남는 법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욕적으로 되고 자학적이 되고 또 수도승이 되고 하는 것을 경건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8:23입니다.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합니까?

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아직 우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습성과 거룩함에 있어서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준과 성품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런 물질이나 몸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에는 죄가 우리의 인격 자체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욕심으로부터의 소원과 모든 소망, 모든 것이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가 내 인격 전체를 지배합니다.

은혜와 의와 거룩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아직도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도구로서 쓰임 받을 때 몸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것이 몸이라고 할 때도 죽을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이 없어지고 정신만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이 아니라 죄의 원리대로, 그의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육신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씁니다.

육신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는 이런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은 껍데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생각이 인간을 지배하면 그때는 우리가 육신에 거한다고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성경이 대조하기 위하여 표현한 것이지 물질적인 것, 이것은 악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그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에서 이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 모든 것에 대한 완성의 소망을 성경을 여러 군데에서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3:20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우리 시민권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운명은 결정적입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왜 기다려야 하느냐 하면 우리 몸의 온전한 변화를 위하여, 우리 성품의 온전한 완성을 위하여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 겪는 실패, 죄에 다시 빠지는 것을 여러분으로 보지 마시란 말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나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절망을 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럼 어디에다 나를 두어야 합니까?

그 절망하는 나에다 우리를 두어야 됩니까?

내 실패는 죄를 다시 짓게 하고 실패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그쪽으로 끌고 갈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신자가 겪는 가장 큰 유혹과 실패가 무엇이냐 그러면 이 죄에 잠시 빠지는 것, 죄를 다시 짓는 실패가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평양을 가야 되는 존재라면 여러분이 서울에서부터 뒤로 수원을 가거나 천안을 가거나 대전을 가면 그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되짚어 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간 것만큼 다시 돌아와야 본전이고 그 다음에 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결국 평양을 가야 되는 존재라면 거꾸로 가면 갈수록 손해이지 거꾸로 가서 결국 부산 가서 끝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신자 된 운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나는 결국 평양 못가고 부산 가고 말겠구나, 부산 앞바다에 가서 빠져 죽어야지’ 이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정신을 차리고 돌이킬 수 있느냐 하면 ‘내가 결국 평양을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이쪽으로 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하는 생각이 여러분을 구원해 냅니다.

이것이 성경이 여러분을 위로하는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 깨우침을 여러분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입니다. 이제 분명해집니까?

10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 10-11): 너희는 이제 구원을 얻은 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물론 이것은 성화에 관한 내용이지만 로마서 6장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성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칭의가 어떻게 성화에 철저한 근거가 되느냐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으니 나갈 길은 성화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의 결론은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적 예배란 무엇입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즉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고 하면 이런 문제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사업 위주입니다.

종교적인 행사 위주입니다.

선교를 하는 것도 좋고, 전도를 하는 것도 좋고, 구제를 하는 것도 좋고 뭐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하면 신자들의 신앙의 핵심을 오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너무 능력 위주로 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선교를 한다고 할 경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교사로 나가거나 선교사를 돕는 후원자가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구제를 한다, 그러면 어려운 사람에게 가서 힘써서 도와주거나 혹은 돈으로 지원을 하거나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신앙이 자꾸만 능력으로 가고 있습니다.

능력으로 가다 보면 똑똑한 자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자가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대표적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들어와 구원을 얻은 자로서, 새사람으로서 남겨진 옛 성품을 몰아내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신앙의 최고 목표요, 최고의 싸움이요, 최고의 핵심입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하느냐, 안 하느냐’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적인 행사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훨씬 많은 자질구레한 일에서 여러분의 성품의 변화를 증명해 내야 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 속에서, 자존심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세상적인 오해에서, 여러분이 신자로 변한 그래서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 성품을 입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 여러분을 증명해야 되고 여러분 자신을 전진시켜야 됩니다.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애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느냐 하면 종교적인 사업, 신앙적인 어떤 형태의 일들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 여전도회 회장, 성가대 솔리스트,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어떤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딴 곳에서 대단히 못되게 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나 장로에게도 큰 시험이고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두드러진 오해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들도 어떤 소원을 하게 되느냐 하면 보란 듯이 한 번 그런 멋진 일을 할 능력을 하나님께 자꾸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주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속상해 하고 그런 큰 돈을 낸다든가 어떤 재능을 나타낸 사람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싸움은 이 옛 성품을 몰아내서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 성품에 참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리를 가주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리이지 여러분이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는 전혀 신앙과 무관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을 이제 이 신령한 싸움으로 초점을 맞추시고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싸움이 여러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은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겨야만 됩니다.

이기기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졌거든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을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실패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운명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리셨고 허락하셨으니 이제 우리 모두가 신앙으로 힘 있게 우리의 싸움을 이기게 하사 주를 닮게 하시고 주의 자녀답게 하시고 새사람을 입히시사 그 거룩함과 온전한 영광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산골짝촌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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