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마서 38강(롬 6:8-11), 주와 함께 산다
로마서 38강(롬 6:8-11), 주와 함께 산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롬 6:8-11)
로마서 6:8-11 말씀 가운데 특별히 8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 답은 1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 8절의 그와 함께 사는 것,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영원한 나라에서 그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은 그 이야기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라든가,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된다.’는 뜻은 미래적 소망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누리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6:4에서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지금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새 생명을 누리가 한다는 것이 우리가 읽은 6장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주와 함께 산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라’하는 것이 무엇이나가 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산다고 하는 말이 언제나 신자에게 성화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입니다.
성화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와, 칭의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죄와 그 통치,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풀려 나와서 새 생명의 영역 안에 들어갔다는 것이 로마서 5장에서부터 6장에 이르도록 내내 사도 바울의 관심을 끄는 내용입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지 않고 은혜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로마서의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사실상 성화에 관한 이야기는 12장을 넘어가서야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있어서 8절에 있는 것같이 ‘그와 함께 산다’, 11절에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내 욕심만 따라 살지 않고 내 고집대로 살지 않고 주님께서 사는 것, 주를 위해 사는 것, 이런 성화적 차원의 권면으로 받아들이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커다란 문제가 아니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아주 뿌리 깊은 문제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이 본문을 특별히 관심 있게 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산다.’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오해하게끔 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이 구절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종종 성화의 구절로 오해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그렇지,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나는 없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으로 살아야지, 주께 나를 일임해야지’하고 이것을 성화의 말씀으로 마음에 작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의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구원을 행위로 받느냐,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이 표현은 적확히 로마서 6:8이나 11절과 흡사한데 그것이 20절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上).
그러나 그 다음을 보십시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죄가 나를 다스리지 않는다, 은혜가 나를 다스린다, 이제 나는 영생 속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죄의 영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영역에 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이 성화로 오해되는 때에는 우리는 열심히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는 싸움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화의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고 꼭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8과 11은 영역과 통치와 우리의 지금 신분과 위치에 관한 이야기이지 성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가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끌고 와서 이런 오해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를 향하여 살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고 나를 죽여야겠다.’
이것은 성화이지 칭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나가 실패를 하면 ‘나는 구원 얻은 신자가 아닌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이 부작용이 어떠한 형태로 자주 일어나느냐 하면 손뼉 치면서 찬송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삼창하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목이 터져라 ‘주여’,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 자체를 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감정이 동원되는 것이고 기쁨과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아우성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이와 같은 일종의 몰아의 경지로 가는, 그래서 자기를 잊으려는 몸부림, 이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거듭거듭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나를 장악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이런 잘못된 권면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세가 있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심을 믿습니다.”를 백번 외워라 이것입니다.
“나는 내세가 있음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번하기 전에 한 50번만 넘어가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까먹고 의심조차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뇌가 사고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지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마취제를 맞아서 통증이 없어진 것과 병이 치료된 것이 다르듯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잊고 이것이 내가 주님 앞에 장악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해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 구절이 성화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위치, 신분,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사실을 확인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우리는 분명하게 이 문제들이 몰아의 경지에 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 눈 똑바로 뜨고 확인해야 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확인해야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6장으로 와서 우리는 이 문제가 우리의 체험과 경험 밖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8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롬 6:8). 9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9-10).
주님의 죽음과 살으심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다시는 사망의 주장아래 있지 않고 이제는 그 밖으로 나와서 영생가운데 계심을 9절과 10절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까?
8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에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나의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된 나의 나 된 경험, 주님의 경험이 나의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너희가 죄 안에 있지 않고 의안에 있으며 형벌 아래 있지 않고 영생 아래 있음을 알리는 것을 무엇을 근거로 제시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셨다’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체험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신자며 영원한 소망이 있으며 주안에 있음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이라는 것으로만 우리 구원에 대한 모든 근거와 증거를 삼지 ‘내가 어떻게 되었느냐’로 근거를 삼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4장으로 가 봅시다.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내가 죄에서 나오고 내 의로운 자리에 들어가는 것, 모두가 내가 죽고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대신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 6:8이나 11절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말속에는 ‘우리가 체험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무엇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냐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며 죄 아래 있지 않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을 알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성화로 가는 근거요, 그것이 가능한 뿌리이지 우리가 만들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갈라디아서 2:20에 있는,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성화로서 여러분이 꼭 해야 되는 책임이지만 그것이 나의 근원의 근거요, 확인으로서 드러나지는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수를 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 되었다는 것을 내 경험 속에서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인가를 확인하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예수 믿지 않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때보다 죄를 덜 짓습니까? 그때보다 죄 된 생각이 덜 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이제는 이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던 것, 그리고 질 수가 없으리라고 상상했던 죄도 짓습니다.
이것이 깜짝 놀라는 현실입니다.
물론 불신자일 때보다는 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같은 종목의 죄들을 짓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아주 심각한 상담을 해 오셨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내 오셨는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입니다.
이상하게도 자꾸 기도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욕설이 나온다고 합니다.
본인이 너무 괴로워서 귀신이 붙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불신자인가, 내가 도대체 신자인가라는 깊은 회의 때문에 편지를 쓰셨습니다.
제가 그 답장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에베소서 강해]를 한 권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안에 바로 그 문제를 다룬 것이 나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설교자이고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성경에 대하여 대단히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에베소서 강해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가지 죄 중에 자꾸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죄목 중에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예를 여러분에게 드는 것은 신자라면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죄도 우리가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있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구원 문제에 대한 오해가 나로 하여금 내가 정말 신자냐, 아니냐를 확인하고자 자신의 과거로 들어갑니다.
과연 자신의 죄를 집어던지고 죄를 뿌리 뽑은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벗기 위하여 우리의 죄 짐을 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진 적이 없고 우리가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하여 그를 사망에 내어 주고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여 그를 부활시켜서 나를 그 안에 묶어 죄로부터 탈출시켰고 의와 영생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싸워서 죄를 물리치고 죄에게 승리하고 거기서부터 내가 탈출하고 의와 거룩으로 입문하고 내가 원서 쓰고 내가 시험 봐서 들어온 날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이 이야기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아직도 죄가 생각이 나고 죄를 짓기도 하는 연약한 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존재론적으로 예수와 하나입니다.
나를 실패시키고 나를 구원해서 탈락시키려면 예수를 탈락시키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지옥에 보내지 않고는 나를 지옥에 보낼 수 없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우리에게 그토록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납니까?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확신이 일어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들이 얻은 구원인 것을 감사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6:1의 질문이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은혜도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이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대목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못나게 굴어도 나는 내가 아니며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실패시키려면 그리스도를 실패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은혜가 왜 들어온 것입니까?
우리를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게 하려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구원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를 영원한 형벌로 부터 영광과 거룩의 자리로 가게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닙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벌 받지 않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어 옛날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이제는 의와 거룩을 열매 맺고 아름다워지고 영광스러워지는 길로 가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벌 받는 자리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가 주어진 궁극적인 목표에 발을 맞추려면 은혜가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목표로 한 지점에까지 맹렬히 더 달려가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들이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이렇게 요약해 봅시다.
우리의 진리란,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요하고 있는 사실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 여러분이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할 근거는 여러분의 과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돌아갑니다.
로마서 6:8에서 11절의 권면이 그 증거로 9절과 10절 모두 그리스도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느낌도 경험도 체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는 낯설고 문외한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경험하지 않았고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에 있었던 이야기와 결국 연결이 됩니다만 요약할 두 번째 초점은 체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체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믿어서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말씀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내가 구원 얻은 것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를 이제 수납하는 행위이지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여러분의 경험으로 체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약해야 할 세 번째 중요한 요점은 성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는 이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고백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뭐가 있느냐 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할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답지 못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 봅시다.
8:31입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우리의 경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까 아무도 그 일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2-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이 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구원을 취소케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싸움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신자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는 성화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신자답게 살아야 됩니다.
그것을 실패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여러분의 실패, 외부 환경과 어떤 외세에 의하여 여러분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이 자녀며, 영광 된 신분의 소요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답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거기서부터 다른 싸움입니다.
실패가 이쪽(신분과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성화에서의 실패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신분(하나님의 자녀)을 바꾸지 못 합니다.
성화에서의 실패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순된 생활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나니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성화의 싸움'만 여러분 앞에 있는 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여러분의 성화가 이제부터 열매 맺어야 됩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지지 마십시오.
다른 것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하지 마십시오.
방언이나 희열과 봉사나 열심이나 40일 금식 기도나 선행이나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요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분이 실패될 수도 없듯이 우리의 구원은 패하지 않습니다.
든든한 믿음 가운데 여러분의 성화가 시작되고 성공하기를 빕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하늘 보좌에 앉힌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의 삶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이것이 실패될 수 없음을 인하여 우리 마음에 강한 믿음과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고 남은 여생을 주의 자녀답게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하시고 게으르지 말며 경성하며 깨어 있어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충성되이 우리의 여생을 신자로서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