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존스의 부흥 - 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사63:15-19)
로이드 존스의 부흥 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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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부흥 기도의 열정
이사야 63:15-19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사랑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우리가 지금 숙고할 것은 이 선지자와 민족의 기도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것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반역 때문임을 먼저 인식하고 인내와 끈질김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입니다. 기도는 15절에서 64장 끝까지 계속됩니다.” 1. 이사야의 기도의 위대한 특성들 “우리는 특별한 대목으로 나아가기 전에 그 기도의 양식에 대해서 분명해야 되며, 제가 기도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데 대하여 분명해야 한다는 것은 진수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부닥쳐 오는 것은 긴박성과 끈질김입니다. ··· 그 사람의 전 영혼이 그 기도의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긴박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략질을 당하고 파멸을 당하고 성소는 더럽혀졌습니다. ··· 제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이 교회의 상태와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의 상태를 보고도 시온에 앉아서 그처럼 안일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 궁극적인 재난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할 때만 선지자의 기도를 특징짓는 그 긴박성과 끈질김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의 강한 정서를 주목하십시오. ··· 그의 기도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형식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참회와 탄원 사이를 서로 오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강한 정서의 표증입니다. 강한 정서를 체험한 사람은 형식에 대해서나 어떤 노선에 대해서나 질서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된 나머지 어떤 의미에서 질서 있는 방식으로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주도적인 감정을 토해 낼 뿐입니다. ··· 그래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의 상태에 있을 때마다 똑같은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면 형식은 망각되고 공적인 기도서들은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고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활동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경배와 탄원과 간구의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런 다음의 요소는 간청, 하나님과 따지는 요소입니다. ··· 하나님과 씨름하는 요소가 그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담대함의 요소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모세의 기도에서처럼 여기서도 무엄하다고 할 정도의 요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위대한 중보기도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 우리의 원수가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그는 따지고 논증하고 탄원하며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보기도의 아주 놀라운 요소입니다. 그 점에 역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무가치함과 백성들의 무가치함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탄원하고 나가 따지고 논증하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당신으로 가게 하지 못하겠나이다. 오 주여 주께서는 우리를 거절하실 수 없나이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그는 그 모든 것의 죄악성과 부끄러움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 그러므로 여기에 관계된 원리는, 모든 것을 다 분석해 본 결과 우리의 오직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 교류와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도는 언제나 위대한 이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 위대한 기도의 열쇠는 은혜의 교리를 깊이 알고 포착하는 데 있습니다.” 2. 실제적인 간구의 제목들 “물론 첫 번째 간구 제목은 함축성 있는 ‘주여 굽어 살피소서’라는 말로 표현되겠습니다. 1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 여기에 제일 되는 위대한 요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패퇴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끌려갔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다윗의 성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 그것이 바로 현대교회의 상황입니다. ··· 하나님의 교회가 낮아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파멸 상태에 있습니다. ··· 무엇이 문제입니까? 가장 요청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위대한 기도 속에서 언제나 같은 것이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얼굴을 가장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등을 돌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 ‘아버지’라는 어휘가 16절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 어린 아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는 아버지께 옵니다. ··· 아버지는 그를 돌보지 않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립니다. 그 어린 아이는 계속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아버지가 자기를 봐주기를 원합니다. 그가 참을 수 없는 일은 아버지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린 자식은 아버지께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선지자가 바로 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얼굴을 피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에게 등을 돌리십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그네처럼, 외인처럼 우리로부터 멀리 벗어나십니까?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어 울부짖는 탄원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과 제 영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으로 그러한 간구에 대해 어떠한 것을 알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무릎을 꿇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여러분과 가족을 축복해 주기를 간구하며 그날에 해야 할 일들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 그것은 초심자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어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심을 알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눈 아래서 살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 갈망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 오늘날 교회가 처한 입장과 그가 가장 먼저 요청할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충분한 예민성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미소지으시는 것과 짓지 않으시는 것과의 차이를 아십니까? ··· 하나님께서 교회로부터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흥미를 잃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입니다.” 3. 기도의 단계 1)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임 “여기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는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 ‘굽어 살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굽어 살펴 달라는 것입니까?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우리는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면 안 됩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언제나 출발해야 합니다. ··· 우리는 너무나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진 나머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 개인적인 필요와 교회의 필요를 다 쏟아놓습니다. ··· 성도 여러분 멈춰 서십시오! 만일 지옥이 여러분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곤경이 무엇인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너무 친숙한 나머지 사실상 그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 그는 그 모든 것이 연루되어 흐르는 것 밖에 계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역시 우리는 바르게 설 것입니다. ··· 어디에서 입니까?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우리 주님은 ‘그렇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것은 한결같습니다. ··· 하나님의 거룩성을 기억합니까? ··· 주님을 보십시오. ··· 그가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지 않는 한 바르게 기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망나니 자녀들 같습니다. 죄 용서를 바라고 축복을 원하고 이것저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십시오. 거룩하신 아버지께 우리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면 우리의 죄와 자신의 무가치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 그 다음,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속성입니다. ···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진정한 문제거리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여러분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장막에서 보고, 지금 다시 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에 대한 어떤 것을 들여다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다른 말로 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얼굴을 언뜻 보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선지자는 그것부터 시작합니다.” 2)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상기시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먼저 말한 다음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 그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와, 그들을 다루신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오래 전에 포로생활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 그들은 처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이러한 능하신 일들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신 이야기를 읽어보십시오. 이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성을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 열성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 ··· 그것이 바로 그의 기도입니다. 그는 그 민족과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옛 관계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것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 그런 다음에 다른 어휘를 덧붙입니다. ‘주의 열성이 어디 있나이까’라고만 하지 않고 ‘나를 향하신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놀랍습니다-하나님의 능하신 행동, 능력, 권능입니다. 저는 선지자가 그것을 여기에서 표현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는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 문제는 그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기는 한데 우리를 향해서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면 이러한 날들 속에서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째서 이 모양인가? 하나님의 사업이 어째서 이렇게 내려가는가? 원수가 득세하고 이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능력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께 질문합시다. ··· 그런 다음에 가장 특이한 용어가 나옵니다.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 여러분도 알다시피 선지자는 무엄하게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어찌하여 옛적처럼 우리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하십니까? ···’ 그것이 바로 선지자가 두 번째로 기도하는 제목입니다.” 3) 실제적인 탄원 “그것은 삼중적인 탄원입니다. 첫째로··· ‘어디 있나이까?’라는 것입니다. 그가 탄원하는 이러한 긍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변하실 수 없으니 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 그는 자기의 죄와 그 민족의 죄를 알고 고백합니다. ‘··· 저는 탄원합니다. 긍휼과 인애를 간구할 뿐입니다. 굽어 살피소서··· 보옵소서.’ 그런 다음에 17절에서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 그것이 선지자의 두 번째 간구 제목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요청할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그 인휼과 자비하심과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고 졸라댑니다. 그런 다음에 세 번째로, 모든 간구 제목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1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 우리는 이 난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강퍅케 하시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난제를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실상 그러한 일을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그들로 실수하게 하고 그 마음으로 강퍅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6:9-10에서 그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 물론 신약성경에서도 우리 주님게서 친히 요한복음 12:37-41에서 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 사도행전 28장에도 같은 말씀이 인용됩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로마서 9:18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하는 것은 가공스럽고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냐하면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징벌하시되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우리 혼자 내버려 두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충동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실수를 하게하고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는 환난과 질고를 보내시고 그 질고는 우리를 강퍅케 합니다. 우리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선지자가 기도하는 것은 ‘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그만두소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받을 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 우리로 고집을 부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시여 긍휼을 베푸소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할까를 조심하십시오. ··· ‘··· 저는 그것을 받을 만합니다만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저를 녹이소서. 저는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나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에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을 던집니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위대한 간청입니다. 4. 논증과 탄원의 근거 “그는 백성들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나가서 단언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했습니다. ··· 여러분 마음의 부패에 대해서조차도 모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 주여!’라는 말밖에, 여러분의 기도에 ‘오’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를 테스트하는 매우 좋은 또 다른 시금석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은 부흥이 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표증은 ‘오’라는 말이 사람들의 기도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그런 다음에 그가 탄원을 드리는 근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언약적인 관계를 들어 말합니다. ···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이것이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때 단순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나, 조상들의 이름으로나,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 우리가 조상들을 기대하는 데 정말 심각한 위험이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선지자는 얼마나 옳습니까? 언약을 맺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소유한 것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들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또 다른 언약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 ‘당신의 이름은 영원부터 있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지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그런 다음에 계속 그는 말합니다. ‘주의 산업인 지파들.’ 우리는 당신의 산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백성들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당신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 주의 분깃은 그의 백성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현재처럼 죄와 무가치함으로 가득 찼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나아갑시다.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립시다. ··· 그런 다음에 그의 마지막 논증은 이 다른 백성들-선지자 시대의 갈대아 사람들이나 그보다 더 앞선 시기의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주목하는 어느 누구든지 애굽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복을 받았고, 번창했으며, 소유가 풍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다른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였고 포로였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 하나님 이런 일을 계속하실 수 있습니까? ···’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세상은 그 광채와 영광과 그 번지르르함을 가지고 서 있습니다. 시편 73:4-7에 표현된 것처럼 말입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저희 눈이 솟아나며.’ ··· 세상을 비웃으면서 ‘저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겸손함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오 주여, 주께서 계속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신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 오, 이제 더 이상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돌아오소서. ··· 우리는 여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 하나님이시여 선지자처럼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