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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20강(롬 3:1-4), 유대인의 유익

유승필 2008. 3. 1. 10:18
 

로마서 20강(롬 3:1-4), 유대인의 유익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1-4)



로마서는 그 서두에 복음을 선포해 놓고 구원과 복음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유대인 구별 없이 모두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가를 로마서 1:17부터 지금까지 주제로 삼고 논증해오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저들의 심판받아 마땅한 근거가 저들의 부패상으로 확실히 드러났고 핑계 댈 수 없다면, 유대인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심판 아래 있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하는 것이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고 우리에게 확인시키려는 작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정죄의 근거가 저들의 더러움과 부패상에서 드러난다면 유대인의 정죄의 근거는 2장에서 쭉 논의된 바와 같이 저들의 율법과 할례의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갖고 있을 뿐이지 행사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2장에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1-8)


그래서 행함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중요한 근거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이 자기네들이 구원 얻은 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율법을 준 것은 합격에 필요한 일종의 커트라인이고 표준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하여 좋은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과 같습니다.

좋은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공부를 잘 한다는 표는 아닙니다.

그 참고서를 통해서 실제로 공부를 잘 해야 됩니다.


예전에 그런 기억이 나십니까?

공부를 잘하기 위하여 좋은 참고서를 사지 않고 삥땅을 치기 위하여 샀던 기억이 나십니까?

집에 아무리 책이 많아도 그것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인지 부모님께 돈을 삥땅치려고 하는 것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이방인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거룩의 표준과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대하여 더 나은 표준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하지 않고도 저들이 합격점에 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격은 처음 1:16에서 복음을 선언할 때도 이 복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의 필요성이 이방인 이전에 유대인에게 먼저 제시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9-10)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 모두에게 구원의 필요성과 심판의 보편성을 성경이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고 할례의 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방인들과 비교할 때 하나도 더 나은 점이 없다면 도대체 유대인을 선별하고 선민으로 부르고 여러 가지 기적과 기사로 그 역사에 간섭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할례의 법을 세우신 유익이 무어냐 하는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적인 면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고 오늘 우리가 신앙의 초점을 잡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을 결론에서 만나게 됩니다.

중요했던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은 그것 자체가 구원의 방법이 아니었고 어디까지가 합격선이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 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불과하다면 아나 모르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기엔 분명한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3:1에 나온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절에 답이 나옵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가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라고 나옵니다.

많은 이익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대표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을 맡았다 하는 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으나 수동태로 보아야 원의에 더 가깝습니다.

저들에게 말씀이 맡겨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약속하시는 하나님, 설명하시는 하나님 이 모든 것이 합쳐서 하나님의 계시가 저들에게 주어졌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유익이 있었느냐 하면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고 구원을 기다리는 소망이 약속으로 주어진 유익이 있습니다. 율법이 저들에게 그것 자체로 구원을 주는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길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이 친히 저들을 가르친 선생은 아니었습니다만 학교까지 인도해 주는 길잡이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익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엄존하심이 저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윤리와 도덕으로써 자기를 점검하는 정도밖에 주어진 것이 없었고 좀 더 깊이 가 보았자 양심으로 밖에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회개까지 끌고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던 유대인은 회개를 결실시킬 수 있었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하는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계시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셨고 그리고 저들에게 구원이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을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셨을 뿐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동시에 주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는 당연히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자들을 몰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신명기 8장 말씀과 같이 대표적인 예가 드러납니다.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사막생활을 합니다.

사막생활이 왜 필요했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 8;2-6)


40년 생활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낸 후에 그 곳에 사는 원주민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믿게 아니하고 입국을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 내셨습니까?’ 하고 한탄을 하고 원망을 하여 벌을 받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인시키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적이 강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범죄합니다.

이것이 저들의 항변입니다.

일종의 강변이죠.

그래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먹여 살리십니다.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 고기를 먹이시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으로 저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의복이 해어지거나 그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간섭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가로막는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서 저들을 보호하신 이 모든 것을 통해서조차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광야생활 동안 계속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무엇이 증명되었느냐 하면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위협을 받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먹고 배불러도 범죄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40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40년 광야생활의 결론입니다.

떡이 없어서가 아니며 의복이 없어서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고 편안해도 죄는 속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의와 거룩의 복 받을 만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더란 말입니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것밖에 없더라 하는 것이 광야 40년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입국시키면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듭거듭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이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신 4:32-40)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시고 간섭하신 모든 기적과 구원하신 모든 일들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는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셨는가 하면 저들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깨우치고자 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기위해서 그의 명령을 따라 지켜서 한없이 복 받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기적으로 간섭하셨고 율법을 주어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아까 신명기 8장에서 본 바와 같이 광야 40년 길을 걸으므로 모든 문제가 인간에게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확인케 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명령을 따라 행하여 마침내 영원토록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삼으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 9장으로 가십시다.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그 포로 된 바벨론에서 이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가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단 9:3-11)


회개하는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일들에 대하여 부지런히 가르치셨습니다.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래서 이 심판과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가르치지 않으셨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잘 보호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 받고 어떻게 하면 벌 받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가르치셨고 너무나 엄중하게 경고하셨고 너무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반항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기어코 이 벌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높으심과 그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요 온 천하에 그분 같은 분이 없음을 확인해야 됐고 그리고 인간이 그분 앞에, 거룩하게 합격을 받을 수 있는 지점 앞에 와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분명히 인식했어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배워야 되었던 것이고 우리 모든 신자들이 확인해야 되는 지적입니다.


‘우리를 용서 하십시오’ 하는 것도 그래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구약의 초점은 [이제 우리는 다시 범죄하지 않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는 복 받겠습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늘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의 범죄를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못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자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 (단 9:8-9)

하나님께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사유하심도 주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원래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저지른 것도 우리가 범죄한 탓이고 앞으로도 또 범죄밖에 저지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는 것은 그 잘못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벌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자인 것을 아십니다.

사유하심도 주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고 이 지점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저들에게 얻게 하신 기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이스라엘인이고, 저들이 율법을 제대로 적용했다면 무엇 하나는 확실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와 엎드려 빌며 [저들의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자리에 와 있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익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우리가 잘 아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할 때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과정에서부터 ‘실로가 오실 것이다.’ 메시아가 약속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 방법일 수 있었다면 메시아가 약속될 수 없습니다.

구원자가 약속이 되는 것은 율법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으로 저들을 끌고 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구하는 자리에까지 밖에는 인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으로 저들을 끌고 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구하는 자리에 까지 밖에는 인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인 메시아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이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별 없이 메시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제로 다루다시피 유대인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회개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저들에게는 유익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가면 그 증거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기 위하여 부모님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왔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5-32).


시므온이 경건한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지만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안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드디어 주재께서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셨다 하고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느냐 하면 벌 받을 죄인이라는 확인 지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지점까지 와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뿐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고 하나미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도 않고 구원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익이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지 율법을 통하여 회개하는 자리에 먼저 가 있고 구원을 기다리는 자리에 가 있는 것이 그것 없이 구원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실적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과 대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서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어서 신자가 된 자와 중간에 드라마틱한 어떤 경로를 거쳐서 돌연히 회심에 이른 자와 누가 더 유익하냐 하는 이야기를 낳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돌연한 회심에 의하여 중간에 예수 믿은 사람들이 주로 헤게모니를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펄펄뛰는 사람들로 난장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낫다고 본다면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분명한 유익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분명한 자기 의지적, 이성적, 전인격적 고백과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중간에 믿는 사람들이 신앙의 주도적 분위기를 교회 안에 만들어 내는 것 때문에 한국 교회의 신앙의 초점은 감격, 열심 이런 것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실존적입니다.

자기네들에게 감각 되는 것, 경험, 신비로운 것들이 굉장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든가 방언을 한다던가, 환상을 본다든가, 가서 넘어진다든가 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으로 초점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의 유익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죄라는 시점에서 신앙의 깊이와 초점을 확인학고 있습니다.

감격이 아니라 죄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구원을 얻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복의 시점에서 보지 말고 ‘죄’의 시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자기의 존재를 어떻게 해결해 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과 초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재에 대한 이해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과 우연히 회심한 사람과의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해도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돌연한 회심의 경우는 자신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반하여 어려서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갖고 있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나 하면 부부란 커다란 쇠사슬로 묶인 존재가 아니라 수백만 가닥의 얇은 실로 묶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을 마흔 전에 이해하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부부란 장미꽃을 선사하고 아침저녁으로 째려보면서 ‘난 당신 없으면 못살아’ 이렇게 묶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내가 이 사람하고만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 내가 내일이면 이혼하리라, 오늘 저녁에 해야 하지만 법원의 문 닫았으니까 내일 밝으면 하리라, 그러다가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생겨서 못가고 이러다 20년, 30년을 살고 있는 그런 관계로 묶인 것이 부부입니다.


그것은 절대 고운 정만으로 묶여지지 않습니다.

미운 정으로 묶여지고 10년쯤 지나면 이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언제 또 그 지지고 볶는 10년을 삽니까?

이제는 억울해서라도 같이 살아야지 언제 새로 훈련을 시킵니까?

10년이나 지나고 보니까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겁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번쩍 빛 보고 알고 펄펄 뛰는 정도로는 그렇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차를 10년 운전해도 차 내부를 잘 모르듯이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신앙생활 1, 2년 해보고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냐, 신앙이 무어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10년, 20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40년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살면 살수록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더 많이 놀라게 되고 다 아는 것 같았는데도 더 깊고 새로운 면을 보는 것이 신앙의 기이한 어떤 깊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런 분명한 신앙의 핵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무엇에서 다른가 할 때 <복 받는 것>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신자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하나 있다면 무어냐 하면 죄라는 문제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이었는데 저들은 죄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과 치료하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도 없고 죄를 치료할 방법도 없습니다.

신자는 복 받은 데서 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치료하고 죄가 치료된 자로서 저들과 분명히 할 말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죄가 윤리와 도덕이라면 신자들이 알고 있는 죄는 영적인 것이요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치유된 모습을 유일하게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무어냐 그러면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되느냐 하면 죄가 해결된 자로서 증명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13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 - 16).


빛이란 어둠과 대조되는 것 아닙니까?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진화되었는지, 창조되었는지, 하나님의 존재의 유무를 유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우리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빛이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보고 능력을 가지고 있으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비추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가 해결된 자의 모습을 여러분이 보이셔야 됩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에베소서의 요구입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5장이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화평케 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이 모든 것들은 죄로부터 해방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할 때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로부터 해방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이 죄에서 해방된 것을 유일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다른 어느 것으로도 불신자와 우리가 다른 것을 증명해 내지 못합니다.


예수 믿었더니 병이 나았다, 돈이 생겼다, 행복하다 이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도 저 사람이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저들과 우리가 유일하게 다르고 가장 중요하게 달라야 되는 것, 그리고 우리만이 증명해 낼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존재와 무엇이 진리며 생명이며, 인간이 누구이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가, 죄에 대한 모든 것, 거룩과 영광, 영혼에 관한 것을 우리밖에는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지 않고는, 생명을 힘입어 죄로부터 풀려난 자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동시에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 구원에 대한 확신, 주를 위한 열심이 모든 것이 이쪽으로 먼저 열매 맺어져 쏟아져 나와야 됩니다.

다른 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펄펄뛰고 마음에 아무리 큰 믿음과 능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죄 문제에서 해결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신자의 첫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며 그 거룩하심 앞에 죄인 된 모습으로 출발한 여러분의 모습이 있어야 되고 그 죄가 해결된 자로써 신자의 생명, 즉 의, 거룩, 영원을 향한 올바른 추적이 정당하게 열매 맺는 것으로써 여러분이 신자 된 책임을 완수하셔야 됩니다.

신앙생활이 해를 거듭하고 경험이 축적될수록 여러분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ABCD 배우는 사람을 왜 신앙생활 3, 40년 하는 사람이 부러워합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약점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과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영어를 잘하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미국에서 자라난 사람이 영어를 잘합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태어난 유익입니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영어 문명권 속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재주보다도 영어를 잘하는 것이 최고로 대접을 받습니다.

영어만 잘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땅에서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미국 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영어로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3, 40년 했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과 죄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그쪽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방향 잡으셔야 합니다.

매일의 신앙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이라는 문제와 생명과 진리라는 문제에서 늘 여러분을 점검하시는 것으로 쌓아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막 믿은 사람이 부러운 것입니다.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유대인의 유익으로 우리에게 제시된 이것, 먼저 믿은 자의 유익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을 올바른 것에 초점을 맞추시고 여러분의 신앙이 거룩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것으로 가십시오.

죄 문제를 해결하는 싸움으로 가십시오.

거듭난 자의 의로운 삶으로 모아지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빛이 되실 것이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에녹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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