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_박영선

[스크랩] 로마서 22강(롬 3:9-20), 구약의 가치(2)

유승필 2008. 3. 1. 10:18
 

로마서 22강(롬 3:9-20), 구약의 가치(2)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 9 - 20)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구원은 행복하고 기쁘고 영원히 살고 하는, 이런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이전에 구원이 필요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유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을 벌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인간의 죄인 됨,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의 위치 이런 것들이 확인되지 않고서는 구원의 필요성이나 구원의 감격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 : 18에서 시작해서 3 : 20에 이르는 이 긴 부분이 모두 인간이 어떻게 죄인인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반인 모두가 보편적으로 죄인인 것을 양심 혹은 도덕윤리를 가지고 진단한 이후에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인 됨에는 변함이 없다 하는 것을 증명해 와서 이제 3 : 9 - 20에 이르는 본문에서는 그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 : 9).

10절,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총체적이고 집약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특별히 구약성경을 들어 결론을 내는 이유는 유대인을 포함시키고 싶은 강조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점에 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다시 해야 합니다.

지난번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은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입을 막고 심판 아래 있는 것을 핑계치 못하게 하고 변명치 못하게 하는 데 율법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은 죄를 깨닫는 정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21절에 가서 드디어 복음에 관한 적극적인 설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9절에서 20절까지에 있는 총체적인 결론, 1 : 18에서 여기까지 온 긴 본문 중에 가장 핵심 되는 결론,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과 율법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 말씀을 분명히 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과 또 율법이 그것을 증명하는 기능을 일치시키는 성경적인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 : 25 - 27).

이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 : 28 - 29).

이것은 율법에 어떻게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만나는 좋은 대목입니다.

율법사가 와서 주님께 물은 것은 이것입니다.

율법 중에서 꼭 지켜야 되는 제일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좀 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행하라 그러자 이 율법사가 뭐라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내 이웃이 어디까지이니이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니까. 분명히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면 되는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럴 때는 어디까지가 내 이웃이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마음도 있고 의욕도 있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입니까?

말하자면 내가 몇 촌까지 책임을 져야 됩니까?

그런 질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먼 친척, 사돈의 팔촌까지입니까?

단지 이웃입니까?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을 책임져야 하는 이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 : 30 - 36).


우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비유는 어떤 분명한 한 가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내용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일상생활 속에 이해하기 좋은 것으로 예를 삼는 법입니다.

비유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사람이 시청 앞에서 전철을 타고 동대문을 가다가 소매치기를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강도를 만났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이 피해 가고 레위인이 피해 가고 사마리아인이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이러한 상황 설정은 능히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어떻게 이야기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니까 강도를 만났지, 그러는 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것이고 여리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해서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일곱 바퀴 돌아서 무너뜨린 성입니다.

그러면서 이 성을 쌓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는 저주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이 타락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저주받은 여리고로 갔기 때문에 강도를 만났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비유의 핵심도 아니고 이 비유에서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누구냐? 예수님이다. 나귀는 누구냐? 우리 성도들이다.

기름을 부은 것은 무어냐? 성령님이다. 주막 주인은 누구냐? 성부 하나님이다.

데나리온들은 무어냐? 구약과 신약이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난감한, 대표적으로 성경을 잘못 보는 스타일입니다.


이쪽은 지금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율법에 적힌 대로 하라. 율법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 이웃이 어디까지 입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하여, 어디까지가 이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든 것입니다.


거의 죽게 되어서 길에 누워 있는데 누가 지나갑니까?

그런데 이 비유 중 핵심은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 : 36 - 37).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답입니다.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대로 행하라.

율법의 내용과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겠습니다.

어디까지가 내 이웃입니까?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과 범위를 정해 주십시오.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비유를 통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쪽에서 이웃을 정하는 법이지 도움을 주는 쪽에서 이웃을 정하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도움이란 필요로 하는 쪽에서 권리가 있는 법이지 주는 쪽의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도움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쪽에서 권리를 가지는 생색입니다.

도움을 준다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척 많이 오해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농어촌 교회를 돕자, 이렇게 됩니다.

도와줄 만한 교회라는 것이 뭡니까?

도와주어서 성공해서 생색이 나는 곳을 돕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 안 됩니다.

장학금을 줄 때도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주자, 이것은 일반 사람들의 돕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돕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나중에 성공할 사람이니까, 지금 돈이 부족할 뿐이며, 지금 돈을 대주어서 성공했을 때 이 사람의 성공은 내 돈 덕분이다 하고 본전을 찾아 가겠다는 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도움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즉 율법이 이야기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내용 속에서 바로 그 도움이 자기의 생색은 아닌 것입니다.

즉 율법의 기준이 무어냐 그럴 때 율법의 핵심 되는 기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치장이 아니라는 것으로, 가장 굵은 원리로, 기초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정답으로 로마서 5 : 6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 6 - 8)

사랑이란 무어냐?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대신 죽는 자가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죽는 자가 혹 있는지 모르지만 악한 자를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악한 자를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부모가 대신 죽기는 합니다.

악당을 위하여 부모가 대신 죽기는 합니다.

그러나 악당을 위하여 대신 죽는 남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악당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 악당이 어떤 악당입니까?

이 죄인,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게 내가 복수를 하지 않고 용서를 한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를 위하여 대신 내가 희생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즉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 때 죄인이냐 그러면, 도덕과 윤리,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수준에서입니다.

거기에 못 미치는 것은 죄라고 그럽니다.

율법이 왜 우리를 다 죄 아래 가두었으며 율법이 등장하여 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느냐 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증명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 9 - 14).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똑같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따라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개, 돼지 같은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와 지극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수준에서부터 떨어져 더럽고 추하고 모자라고 벌레같이 된 것을 말합니다.

악한 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는 수준이 격하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 밑으로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바로 그것,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한 사람 속에 동참하여 나타난 것이 십자가이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포함된 것으로 증명되는 율법의 완성이 거기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이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율법이 죄인이라고 지적하는데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우리를 정죄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목숨을 바쳐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수준이라야 율법적 기준에 합격점이고 하나님의 지으신 목표와 원래 지으신 의도에 합격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가면 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 21 - 23).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에서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한 영광의 기준에 못 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수준입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고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것을 앞에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어떻게 보았습니까?

율법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이웃이 어디까지입니까?

라고 묻는 그 질문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율법을 행하는 것이 그 영광스러움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치장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까?


‘어디까지입니까? 범위만 정해 주시면 무조건 저는 하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난 표현이지 자기 치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안 나타나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다 그것이 자기 생색이고 자기 치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로마서 3 : 9 - 20에 있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13 : 10 - 18).


13절부터 18절까지는 모두 이웃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웃을 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가장 두드러진 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드러지게 증거의 자료로 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악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얼마나 먼가를 증명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요 초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막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랍니다.

우리나라 무덤은 땅에다 묻습니다만 유대인들의 무덤은 벽에 굴을 파고 시체를 놓았습니다.

그 굴이 열려 있으면 거기서 썩은 냄새와 썩은 것이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입을 열어서 좋은 말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남을 칭찬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입을 열면 몽땅 무슨 이야기입니까?

누구 잡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말이 다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친해지면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표시라고 그럽니다.

둘이 갑자기 친해지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고 둘이 동시에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친해진답니다.

우리 역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나라와 나라가 손을 잡는 이유가 뭡니까?

공동의 적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 짓을 제일 많이 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 가장 악당이 누구냐 하면 영국인들입니다.

독일이 세지면 프랑스와 손잡고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 뒤통수치게 하고 프랑스가 세지면 프랑스와 손잡고 독일 뒤통수를 칩니다.

싸우고 나서 식민지 얻어먹는 것은 일등이고 절대 양보 안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가졌으면 영국 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요?

웃기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힘이 없어 피해만 입었습니다.

언제나 피해를 입는 쪽이 덕과 정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절대 그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라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악당입니다.

악질이고 못된 놈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명하는데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있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린 다 악당입니다.

선한 일을 한 적이 있다면 생색을 낸 적밖에 없으며 우리가 누구와 친한 적이 있다면 그를 내 편으로 삼아 누구를 함께 죽이기 위하여 친한 적밖에 없습니다.

예외 없이 그렇습니다.


신자란 여기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자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성경이 이렇게 증거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변화입니까?

로마서 14 : 7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변화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 : 7 - 8).


이렇게 인정하십니까?

신자들은 바로 이렇게 바뀐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찬송하기 위하여 생명과 진리를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은 더 이상 열린 무덤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존재와 우리들의 입술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며 덕을 세우는 것이요 생명과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입니다.


구원 얻은바 달라진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처참한 자리, 그 버러지 같은 자리에서부터 이 자리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큼 인간에게 영광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더 이상 남을 죽이지 않으며 저주하지 않으며 남을 해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는, 정말 하나님이 지은 영광 된 인간 본연의 자리에 비로소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감사를 여러분이 하실 줄 알아야 되고 그 기쁨을 누리실 줄 알아야 되고 그 영광 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의 쾌감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작살내는 것 아닙니까?

누가 못되는 것을 보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다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며 안타까워하며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 같이 잘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즐겨 능력 받는 일과 곤란당하는 일과 이 세상에서의 환난을 기쁘게 기꺼이 감수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신자 된 특권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자의 자랑이며 감사거리이며 영광 된 모습입니다.

죄가 무엇인가 분명하게 직시하시고 여러분의 영광 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실 줄 아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권합니다.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산골짝촌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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