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_박영선

[스크랩] 로마서 24강(롬 3:21-24),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

유승필 2008. 3. 1. 10:19
 

로마서 24강(롬 3:21-24),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지난번에는 복음을 설명하는 핵심 되는 부분 중에 첫 번째로서 구원이라는 것을 정의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구별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의 현실, 절망적인 상태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받은 상태와를 비교하지 않으면 구원의 참다운 기쁨과 그 차이를 혼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2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었던 율법이 요구하는 것, 즉 그 율법의 대상인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행해야 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신자들을 가장 혼동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신학적인 자체 내의 논쟁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단 내에서도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의미와 내용으로 추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신신학자들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불트만이라는 학자가 <비신화화>라고 그럽니다.

어느 민족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히브리 민족의 종교였던 이 기독교가 전 세계에 널리 퍼진 것은 저들이 가진 종교성이 다른 민족이 가진 종교성보다 비교적 수준이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추적하는 부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저들은 히브리 민족이 가장 종교적인 어떤 내용들, 한 윤리와 도덕을 사람들에게 잘 인식시키고 수납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신화화했다고 합니다.


착한 일을 권면하고 악한 일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종교적인 형태를 빌어 그 교훈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권면하고 인간에게 고급한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하여 내용에 신화적 표현을 빌어서 썼으므로 신화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고 신화적인 요소를 동원하여 주장하려 했던 그 내용만을 제대로 발췌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이 비신화화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들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꺼냈다든가 홍해를 가르고 건넜다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렇게까지 그 내용을 강조하도록 만든 그 내용에만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박애정신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강조키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격화했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기독교 신앙을 선행을 하는 것으로 삼고 인간의 가장 높은 경지의 실천을 한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저들과 어려움과 굶주림과 문맹을 함께 당하고 저들을 위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신앙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을 자극키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인간들의 선행과 지고한 인간의 이상들을 자극하시다가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을 불살라 모범을 보이사 우리를 도전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실까봐 겁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거룩한 성품과 의롭고 선한 것을 도전하고 자극하고 개발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러 오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도전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깨우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속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는 이것입니다.

기독교를 개념화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을 그 핵심으로 가지느냐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여러분의 신앙과 일치시켜야 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으로 가 보십시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 그러면 사랑의 화신, 4대 성인, 이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보내셔야 됐는가? 이것을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가능성이 없이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유일하게 죄값을 물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그 죄값을 묻지 않고 죄 가운데, 절망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라든가 정직하라든가 착하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고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회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누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결론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여기가 우리가 밤낮 속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논할 때 여러분이 기독교를 무슨 선행이나 고급한 이상의 실천이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현실이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존재와 거룩하신 하나님 아래서, 인간의 위치와의 상관관계에서 확인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의 실패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개념으로부터 갖고 있는 데서 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착한 것과 사랑, 용서라는 개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을 추구하면서 사는데도 여러분 자신이 틀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에서의 명예를 추적하고 세상에서의 욕심을 추적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신앙인인 것 같습니다.

왜요?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좀 낫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이면 열 번 다 실패하고, 다 악질적이고, 다 불의하고 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만 우리는 열 번에 한번쯤은 정직합니다.

열 개 중에 하나쯤은 양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목표로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른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저들보다 덜 악했다, 나는 저 사람들보다 그래도 좀 낫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우리는 아홉 가지를 잘하고 한 가지를 잘못해도 하나님 앞에 죄책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으면 기독교의 모든 종교가, 이 신앙이라는 것이 저들이 열 가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내가 하나만 잘해도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가 늘 신자들이 틀리는 부분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이것,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앞에 서야 되는 우리의 존재를 잊고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의 나타나실 것, 그의 나라.’

이것이 잊혀지고 ‘착한 것, 의로운 것,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이것만이 따로 떨어져서 기독교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과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으며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를 준비해야 됩니다.

이것이 빠지고 선행이라든가 무슨 가치라든가 무슨 의미라든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존재, 이것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제외시켜 놓고 기독교의 내용이 우리를 속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자, 이런 것들이 우리를 세상적인 욕심과 세상의 가치와 세상 방법 속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한 두 가지정도 하는 것으로 우리가 마치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인 양, 우리가 할 일을 다 한 양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를 이렇게 꾸짖는 것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의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1-2).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 착하고 거룩한 것이 왜 가치가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저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저급한 것을 욕심내는 동물적인 수준이 아니고 고급한 인격이라는 것을 증명받기 위하여 종교가 여러분에게 소용되고 있습니까?

잘못입니다. 


모든 기독교적 신앙행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의 심판을 준비하는 싸움입니다.

그의 기뻐하심을 향한 나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가 없이 세상적인 가치로써 종교가 동원되면 사람의 박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왜 존재합니까?

여러분이 주일 아침마다 오는 이 종교적인 행위는 왜 존재합니까?

내가 세상의 속물과는 다르다는 증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거룩에 여러분을 접근시키는 행위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사람 앞에 서 있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묻고 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된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 : 1 - 7).


금식이 뭐라고요?

금식이 밥을 굶는 것이 다가 아니고 밥을 굶어 가지고서 얼굴이 흉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금식의 목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행위가 사람에게 박수 받는 가치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금식이란, 즉 종교적 행위란 무릇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라야 합니다.

주린 자를 보면 너희 마음이 동해야 되고 결박당한 자를 보면 그 결박을 풀어주는 자가 되어야 하고 내 골육을 대하여 숨지 않는 것, 고아와 과부를 피하여 숨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어야만 되지 그것이 사람에게 우리가 종교적 인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 불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약점이요 병폐란 말입니다.

성경은 들고 있고 헌금은 하고 있고 찬송은 부르고 있는데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근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인간적으로도 똑같이 하고 세상의 것에서도 남에게 지지 않으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고귀한 인격을 가진 자라는 종교적 치장으로까지도 남에게 지지 않는 교활한 자가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을 향한 사랑도, 주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의 두려움도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된 변화도 신자들에게 없습니다.


이 나라의 신자의 비율은 무척 높습니다.

사천만 인간 가운데 천만이 넘는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중에 대부분은 사기꾼들인 것입니다.

구원은 못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더럽게 받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옛날 바리새인들을 꾸중한 것같이 너희가 천국열쇠를 가지고 너희도 안 들어가고 남들도 못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정확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꼭 가면서 어떤 소리를 합니까?

‘이것을 누가 들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들어야 할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남에게 이 이야기를 돌리지 마십시오.


호세아 6 : 1 말씀부터 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을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 : 1 - 6).


번제보다도 무엇을 원한다구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6 : 1 - 6에 이르도록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께로, 여호와께로’입니다.

선행으로, 고귀함으로, 사랑으로가 아닙니다.

‘여호와께로’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게 지으신 하나님이 제외되고 거룩을 논하고, 신앙을 논하고, 기독교를 논하고, 종교를 논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해지고 기독교가 논의되면 거기는 언제나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에 인간이 섭니다.

이런 고급한 것을 추적하는 ‘인간의 잘남’, 자기의 모든 권리를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인간의 고귀함’, 인간이 그 영광을 다 취해 먹는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 배신하고 더러운 것으로 스스로 원해서 뛰어 들어갔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을 능력이 우리에게 없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선을 찾는 것이 없었던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던 존재요 하나님이 이 불쌍한 우리들을 찾아 오사 이제 거룩해진 존재들입니다.

이 하나님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구원을 논하고 신앙을 논할 때마다 더럽고 무가치한 것을 무지와 연약함과 완악함 속에서 쫓았던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생명을 추적하는 자리로 변화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거룩과 의와 생명과 진리가 세상과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늘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입니다.

하나님, 빛을 더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 지식을 주십시오, 의와 거룩을 주십시오, 불쌍히 여기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내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돈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이것은 기도제목에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뿐입니다.

그것 빼놓고 기도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더 큰 자동차, 더 오랜 생명, 더 높은 지위, 더 아름다움, 더 잘난 재능 이것 외에 기도해 본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신자답게 살지 않으면서 교회를 채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마십시오.

여러분 혼자 죄 가운데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더러운 욕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마십시오.

신자답게 살지 않을 것이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치장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있다면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우리가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영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구원하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 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도요, 감사이어야 합니다.


시편 27편으로 갑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여러분의 신앙을 모으셔서 함께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아멘”(시 27 : 1 - 3).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산골짝촌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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