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6강(롬 6:3-4), 죄에 대한 죽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3-4)
로마서 6장에서 설명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은혜가 갖는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 전적인 이유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이나 시작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고 이유이고 능력이며 은혜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6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애를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이런 질문에 부닥치게 되고 그 문제야말로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질문거리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할 수 없는 이유를, 은혜가 왜 왔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그 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더 죄에 거할 수 없느냐 하면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죄에 죽었느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나와야 되고 새로 들어가야 되는 곳, 즉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나오고 의와 거룩과 영생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되는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서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나오기 위한 죽음, 의와 거룩과 영생의 영역에 들어가는 부활을 주님이 하시고 또 우리는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 일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로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았고 주님이 하셨다는 것 때문에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에 거하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은혜란 우리의 노력이나 근거 없이 공짜로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된 방법인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가 더 크게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은혜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방법을 쓰게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의와 거룩의 영역으로 옮겨가도록 하기 위하여 공짜로 되는 이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죄로부터 나오고 의와 거룩과 영광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어떤 의도와 어떤 목적을 가졌느냐는 자꾸 외면되고 공짜로 됐다는 것만 강조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필요가 왜 있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져들게 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6장을 통해 바로 그 은혜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냈고 의와 거룩과 영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더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 어떠한 국면에서의 연합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그러니까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그의 장사 지낸 바 됨에 연합되어 있고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세 국면에 연합되어 있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고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5장을 해오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서 죽음과 부활의 결과를 맛보고 있지 우리 혼자서 죽음과 부활을 만들어 내거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고 예수님만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난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거나 체험적 사건이 아니고 객관적 사건이며 우리에게 이루어진 어떤 사실임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서 5장에서는 대표 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를 그때 보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거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감각이 있지 않음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했습니까?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어떤 의식을 가지거나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능력을 갖기 전에도 죽는 것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가 죄를 지을 능력도 시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인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와 사망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인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구원을 얻었다’라는 말 속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베푸신 구원으로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며 우리의 운명이 주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떤 면에서 많이 오해하느냐 하면 성화의 문제와 더불어 가장 많이 오해합니다.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예가 많습니다.
신자들이 자신의 회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성화의 과정으로 이 죄와 사망에 관하여 죽은 것을 도입하는 예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영적 생활을 위해서 ‘죄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라고 가르침을 받거나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책 가운데『자나다 죽을 때』라든가『옥합이 깨어질 때』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내용도 아니고 또 틀린 제목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칭의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때가 있고 성화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때가 있는데, 표현은 같게 나오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2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 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성경 가운데는 분명히 우리의 옛 행실을 죽이라든가, 십자가를 지라든가 하는 식의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다릅니까?
먼저 성화의 차원에서 쓰여진 구절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구절을 한 번 예로 들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말씀을 봅니다.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에는 분명히 나는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고 나는 이제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며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살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고 우리는 이것을 성화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취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은 성화의 예가 아닙니다.
11절로부터 봅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고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조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고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1-19).
게바란 베드로입니다.
그때 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와 그 일행이 오자 할례자가 무할례자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법에 따라 황급히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면책했다고 합니다.
그 면책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의 구별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면 유대인이라는 구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에도 어떤 조건이 된다고 아직도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즉 할례를 받는다든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아직도 하나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 하는 것이 아니냐?
너와 네가 사도된 것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줄 알고 그 일에 우리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가 유대인들 앞에서 이방인들을 구별함으로써 마치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 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과 함께 율법의 조건이 필요한 것같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갈 2:19).
그러고 나서 20절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지 않느냐?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얻었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원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20은 성화의 예가 아니고 구원에 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우리가 어떻게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느냐?
율법을 지켜서냐? 할례를 받아서냐? 아니지 않느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거기서부터 나오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그 안에 품으시고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우리가 그와 연합한 자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결과로써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갈라디아 2:20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어떤 체험과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죄의 아무 뿌리나 생각이 남아 있지 않는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그 죄에 대하여 죽기 위해서 고행을 하기도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도 하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단절된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그런 노력을 많이도 해 왔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영역과 통치의 개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에 대하여 죽어 있지 않습니다.
죄의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죄의 통치 속에 있지 않습니다.
죄의 환경 속에도 있지 않고 죄의 통치 아래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와 거룩의 영역에 있고 은혜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얼마나 분명히 있느냐 하면 우리가 읽은 로마서 6장 식으로 하자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장사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곧 갖다 묻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 땅속에 갖다 파묻기까지는 그래도 어쩌면 희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갖다 묻으면 이제 끝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써 분명해지고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 장례입니다.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사망에 대하여 죽었는데 얼마만큼 확실하냐 하면 그 일에 대하여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우리 안에 아직도 죄의 유혹과 죄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죄가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냐면 불신자는 가끔 착한 일을 해도 돌아가는 집이 죄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한 것이 어색하고 우습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지으면 어색합니다.
이제부터도 여러분은 죄를 많이 지을 수 있습니다.
횟수로 많이 지을 수 있지만 죄에 계속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진 것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남이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죄를 지으면 여러분 안에 그것이 부딪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여러분을 인도하고 여러분 안에 계시는 이가 죄와 함께 계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왜 내 속에 죄에 대한 뿌리와 죄를 지을 가능성들이 남아 있느냐고 반문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고쳐야 되는 문제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생각과 죄에 대한 감각과 죄에 대한 어떤 실패도 우리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영국에 가서 산다면 여러분은 저절로 영국식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양인으로서 서양에 가서 살면서 서양 문화에 익숙한 사람을 바나나라고 부릅니다.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얗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을 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한국에 오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결국은 정신의 깊은 것까지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에서는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차가 너무 난폭하게 다니고 사람들이 몸들 떠밀고 말들을 너무 험하게 하고, 불친절하고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한 분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미국은 법이 사정없이 집행되지 않는가?
한국은 법이 말도 안 되게 굴지만 그것이 나에게 유익을 주는 때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여기는 법대로 되는 게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대한민국에서 누가 잡혀 들어갔다면 한 다리 건너서 알아보면 다 일가친척입니다.
나올 수 없는 일에 나오고 잡혀갈 수 없는 일에 잡혀가고 뜯기지 않을 돈 뜯기고 생기지 않을 돈 생기고 그래서 공평합니다.
한국에서 사는 즐거움을 여러분은 모르시죠.
운전하고 가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필요한 대로 고르라고 면허증과 현금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분이 돈 받아 가지고 간다고 자기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인이 학교 선생님께 갖다 드립니다.
그 학교 선생님은 목사님께 드리고 목사님은 교통순경에게 주어서 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모든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하고 그래서 관계가 돈독해지며 행복하게 사는 나라, 아! 대한민국, 이 재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것은 어디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에 물이 드는 법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통치한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옛날에 죄 속에 이틀 있었으면 이제 하루 있고 이제는 반나절 있고, 한 시간 있고 시작했다가 중간에 손을 놓아 버리고 그렇게 점점 바뀝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신앙은 도무지 발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발전할 때는 외적인 실천보다 속에 있는 원리로부터 발전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소원과 실천은 언제나 거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실천이 여러분의 소원을 거의 좇아오질 못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거룩한 소원이 훨씬 앞서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천이 지난 해, 지지난 해에 비교하자면 훨씬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앞서가는 소원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옛날에 가졌던 특이한 생각과 기특한 행동의 차이보다 지금 가진 거룩한 소원과 거룩한 실천 사이의 간격(gap)이 더 커져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영역에 있고 은혜의 통치 속에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멀어지고 의와 거룩에 대하여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주일 아침 예배드리러 온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일 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러다 어느 때인가 성가대에 앉아 있고 그러다가 신학교 가고, 목사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 교회 나가도 아는 척하지 마세요.”
처음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방 오지 마세요.”, “뭐 시키지 마세요.”, “헌금 같은 것 강요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몇 년 내에 어떻게 바뀌는지 아십니까?
중요한 직분을 맡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화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벌써 많이 변해 있고 많이 미쳐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쉬어야 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일이 가장 피곤한 날이 됩니다.
그리고 이 날 많은 봉사와 분주함 속에 지냈음에도 불고하고 이것을 쉼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 안에서 일한 것, 주의 일을 한 것 자체가 커다란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바쁜 하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인, 분명한 정리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것은 성화를 위한 기초 단계가 아니고 내가 성화를 위하여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아래 못 박혀 있기 때문에 성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11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라: 이것은 안 될 것을 그렇게 된 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분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최면을 걸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을 기를 때 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너 좀 학생답게 굴어라” 이것입니다.
학생답게 굴라는 것은 학생이니까 그러는 것이고, 너 좀 남자답게 굴라는 것은 남자니까 그렇고 형답게 굴라는 것은 형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이제 그 일에 걸맞은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여기가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누구에게 드리느냐에 선택권이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고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할 때는 우리는 의에게 우리를 바칠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에게 우리를 바칠 수 있습니다.
14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4).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오. 에베소서 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옛사람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죽이라가 아니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입니다.
새사람이 되라가 아닙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이 되는 일을 우리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 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이 새사람답게 사느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의 책임입니다.
24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것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새사람을 입는 싸움은 우리의 싸움입니다.
새사람다우냐, 아니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구원을 우리 것으로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은혜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와 거룩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즉 구원 얻은 자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는 우리 책임입니다.
그것이 구원 자체를 성립시키거나 취소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가끔 신자들에게는 이런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구원을 선택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합니다.
성화를 선택하는 것은 구원이 되어진 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화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성화를 선택하게 내버려 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좀 더 유효하고 좀 더 풍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협조해야 됩니다.
이것은 성화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5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무엇이라고 합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네가 누구인지 알아라.’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운명을 여러분이 취하하거나 포기하거나 실패케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은 성화입니다.
성화가 실패됐다고 여러분이 천당 가는 것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을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느니라.’가 눈에 들어오십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은혜가 우리를 죄에서 꺼내서 어디로 보내려고 베풀어진 것입니까?
영광의 자리로, 의와 거룩으로, 생명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의 우리의 자랑으로 가게 하기 위하여 은혜가 도입된 것인데 그것이 공짜로 됐다는 방법론 하나에만 집착해 가지고 또 공짜로 가서 타락합니다.
‘또 용서해 주시겠지’, 물론입니다.
여러분이 죄지으시고 회개하면 또 용서하시고 거기서만 들락거리면 뭐 되는 것입니까?
완전히 거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가 도입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여러분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 마음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됩니다.
어리석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떠밀고 있느냐를 주의 깊게 들으셔서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은혜 아래서 누리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 이유는 우리가 은혜 아래서 누리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 이유는 우리가 죄의 영역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아무도 더 이상 뒤를 돌아보거나 죄에 대하여 집착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본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 동안 바로 이 은혜가 왕 노릇하고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의 목표와 그 방향을 향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준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의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것을 이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리석지 말아야 하겠고 세월을 아껴야 하겠고 지혜로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부름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과 정신을 합쳐 충성되어 순종하고 따라가서 우리에게 이미 허락된 하늘나라의 그 복된 자리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은, 주의 구원을 얻은 그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심령들에게 되어진 일을 이제 밝히 보게 하시고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분발케 하사 이 짧은 인생이 주 안에서 승리하여 주를 만날 때 찬송과 감사와 영광 속에 주를 뵙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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