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5강(롬 6:3), 세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3)
이 본문 3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많게 번역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그 번역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우리가 이 본문대로 풀이를 하자면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에도 함께 동참했다”
일차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죽음에 동참했다”는 이 말씀이 본문에 등장한 이유는 잘 아는 대로 1절에 있었던 중요한 질문, “그런즉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의 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구원 얻었다고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자격이나, 조건이나, 근거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필요성도, 준비도, 노력도, 결심도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결국 필요한 것은 은혜로 주시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럴 수 없다고 하고, 그럴 수 없다는 이 이야기 속에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답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에서 세례라는 표현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예식으로 행하고 있는 세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식을 행하는 이 세례가 무슨 내용을 의식화한 것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가시면 세례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20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은 노아의 홍수 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그 물입니다.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 홍수가 분명히 심판하는 것으로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고, 곧 세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라는 것은 노아 홍수라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그 뜻이 밝혀질 것입니다.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합니까?
노아 당시 물은 분명히 심판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뜻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 악한 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악당들이 사는 곳에서 착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그 한 사람을 악한 곳에서부터 데려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의 방법은 그 착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악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은 악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심판의 방법이었지만 노아와 그의 식구들 쪽에서 보면 그들이 구원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물은 심판자들에게 심판의 방법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의로운 자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이었는데 이 구원을 얻는 방법에 이런 뜻이 하나 더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노아의 방주가 없었다면 그들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고 그 아래 가라앉히지만 배는 물 위에 뜹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이 물로 말미암는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주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노아 홍수에 관한 사건을 통하여 세례에 관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세례란 무엇이냐 하면 분리와 단절입니다.
죄악된 것, 더러운 것,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영역에서의 탈출입니다.
거기서부터 탈출하여 어디로 가는 것이냐면 죄와 사망에서 탈출하여 의와 거룩과 영생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 세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데 속하기 위하여 원래 있었던 소속으로부터 이탈되어 나오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0:1로 가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이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할 때 애굽을 탈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하여 저들이 홍해를 건넙니다.
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2절에 있는 바와 같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조금 더 이해에 근접합니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였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애굽 백성들에게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가서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노예의 신분도 끝이 납니다.
죽으면 더 이상 그 신분이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쪽 약속의 땅, 곧 가나안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민족이 홍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원래 소속되었던, 그들이 노예로 있었던 애굽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됩니다.
거기서 탈출을 해야 됩니다.
그 사건을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그가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소속으로 연합하기 위한 이 방법을 세례라고 하는데 이 일에 한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홍해라는 바다에서는 멀쩡한 인간, 곧 자연인은 거기서 죽고 다시 아무도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노아의 홍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이 죄인 된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속되기 위해서는 저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됩니다.
악한 세력, 곧 죄와 사망의 소속으로부터 나와 새롭게 의와 거룩한 영생에 소속되어야 하는 이 일에 있어서의 난제는 앞에 소속에서 이탈하기 위하여 죽은 다음에는 새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죽이고 의인만 남게 할 때, 새로운 소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방주 속에 들어가야 했듯이 출애굽 사건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모세에게 속하여 건넜다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입장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 됩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의 홍해사건이 왜 가능하냐 하면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살았지만 그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교육받다가 자기가 히브리 민족인 것을 알고 자기 민족 편을 들었다가 쫓겨납니다.
그래서 광야로 먼저 갔었습니다.
육로로 건너갔지만 홍해를 건너 광야라는 곳에 그는 건너갔었던 자이고, 또 그의 백성을 꺼내기 위해 건너온 자입니다.
즉 모세는 어디에 속한 자로서 오느냐면 홍해를 건너가 있는 자로서 이들을 꺼내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죽고 끝날 수만은 없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금 시작은 애굽에 소속되어 있고 약속의 땅에 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그들 스스로는 못 건넙니다.
그러나 모세가 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냄으로 모세에게 속하여 이 탈출과 새로운 소속이 가능해졌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의 출애굽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례 문제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란 예전에 소속된 곳에서 이탈 분리되어 결별하고 새로운 곳에 소속되고 연합하는 이 일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는 우리 혼자서는 옛 소속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소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어떤 이 속에 들어가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이 세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어떻게 증거되어 있는가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2:12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니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고전 12: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13절 말씀인데 여기서 성령 세례는 성령이 부어진, 성령을 부어 준 세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우리말보다는 영어가 원문의 그리스어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영어 표현을 쓰자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세례는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세례를 베푸는 이가 누구인가 그러면 조금 전의 노아 홍수로 이야기하자면 baptized by God the Father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고 방주에 넣어서 그 심판에서 저들을 구합니다.
누가 세례를 베푸는가?
이 고린도전서 12:13은 baptized by the Holy Spirit입니다.
성령께서 세례를 줍니다.
성령께서 이 세례를 주면 그들을 어디로 보내는, 무엇에서부터 어디로 보내는 세례입니까?
into the body of Jesus Christ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세례라고 할 때 보통 말하는 성령 세례는 baptized with입니다.
'누구를 받았느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부어지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with the Holy Spirit로 쓰지만 지금 여기서 쓰는 것은 세례를 ‘누가 어디로 주었느냐’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는 세례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어디로부터 어디로의 존위 이동이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2:12로 가서 조금 더 분명한 표현을 봅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여기서 세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례 속에는 그러기 위하여 누구 안에 소속되는 것도 말합니다.
영어 표현을 보십시오.
you라는 말의 복수에 고어를 씁니다.
ye were buried with him in baptism.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떻게 함께 죽을 수 있느냐 하면 in baptism, ‘세례로 말미암아’입니다.
세례라는 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켰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음을 같이 맛볼 수 있었고 또 함께 살아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말이 크게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영역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의 복 주시는 영역으로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야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로마서 6:3로 돌아와서 이런 모든 설명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봅시다.
“무릇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우리가 보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영어로 확인을 해 보면 know you not that so many of us as were baptized into Jesus Christ 그러니까 앞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는 것을 제대로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러한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그와 합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were baptized into his death입니다.
그와 연합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죽으신 것에 나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는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면 하늘 보좌 우편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데 또 어떻게 죄 속에 있느냐는 말입니까?
우리는 죄 속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주님이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 가지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죽게 하고 그리고 하늘 보좌 우편에 함께 우리를 앉히셨습니다.
다시 에베소서 2장으로 갑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허물로 죽은 우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었다고요?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왜 그리스도와 살려야 됩니까?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려면 우리 혼자로는 못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주님이 연합해서, 고린도전서 10장 식으로 이야기하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무슨 세례를 받아야 됩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원래 우리가 누구의 소속이었습니까?
죄와 사망의 노예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아 그와 연합한 다음에는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이 세례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나누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속된 영역,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의와 거룩과 영생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 오신 주님께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는 갈라디아서 2:20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은 이런 차원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태복음 28:18 이하의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가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이 회심하시기 전에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바울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신자들을 핍박한 것이 주님을 핍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주님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광 된 구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 안에 내포시키시고 우리가 전에 있었던 소속되었던 영역에서 끄집어내셔서 의와 거룩과 영생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전 거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질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설명이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벗어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세례를 받게 하신, 성령을 통한 이 놀라운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 시켜서 이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우리가 함께 있게 됨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우시기 전에는 우리가 아담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아담에게 일어난 일이 모두 우리에게 결과된 것같이, 즉 아담의 신분이 우리의 신분이었던 것같이 이제는 예수님께 우리가 소속되어 있어서, 아담으로부터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것은 다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려면 예수님이 취소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지위가 취소되지 않고는 우리의 구원은 최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설명들을 자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0에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무엇이 된다고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의로우신 것은 나도 의로운 것이 되고 예수님의 지혜는 내 지혜고 예수님의 영광은 내 영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구원은 그의 결심과 그의 노력과 그의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일에 근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무엇으로 확인해야 되느냐면 확신과 감동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 사실로 확인해야 됩니다.
골로새서 2:9로 가면 “그 안”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우리 보고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충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충만해졌다고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충만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충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우리의 충만한 것을 우리가 다 느끼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다 익숙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얼마나 누리고 사느냐의 싸움이지,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의 신앙은 결국 사실을 얼마나 확인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이냐를 아는 싸움입니다.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라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사용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울었다가도 다음날 딴 짓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기분과 체험과 느낌으로 자신을 근거한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게 못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일련의 내용들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 사역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 저것을 하라고 전해진 소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 무엇을 얻었고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전해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의 신자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존전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이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주를 만날 준비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제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지혜에 대한 싸움과 성실에 관한 싸움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셔서 부디 승리하시는 신자들이 되길 권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고 주님 안에 부르사 우리로 주님과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하늘의 승귀됨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과 약속된 운명을 기억하고 이제 지혜롭게 성실히 우리의 삶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헛된 것들과 낭비하는 것들로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말게 하시고 근신하여 깨어 있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경건을 연습하며 주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우리의 영광 된 자리에서 칭찬과 박수 속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로마서강해_박영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마서 37강(6:5-7), 죄의 몸 (0) | 2008.03.01 |
---|---|
[스크랩] 로마서 36강(롬 6:3-4), 죄에 대한 죽음 (0) | 2008.03.01 |
[스크랩] 로마서 34강(롬 6:1-2),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0) | 2008.03.01 |
[스크랩] 로마서 33강(롬 5:20-21), 은혜의 왕 노릇 (0) | 2008.03.01 |
[스크랩] 로마서 32강(롬 5:20-21), 율법의 기능 (0) | 2008.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