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3강(롬 5:20-21), 은혜의 왕 노릇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20-21)
이제 로마서 5장을 마치면서 마지막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귀한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5장은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구원의 확신을 주려는 의도가 그 중심 내용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실존적 차원에서 나를 기준으로 하는 나의 감격, 나의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어떻게 확고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어떻게 영원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분명한가, 어떻게 취소 될 수 없는가를 확인시키는 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는 의문 거리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모자람대로 그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이것을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승리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우리는 지난번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내용을 성경 상에 있는 중요한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의 얻은바 구원과 받은바 은혜가 어떻게 확고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미련함과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침내 우리에게 일어나고야 말 것인가를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로 가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디말에게서 벨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1-6上).
많은 이들이 성경 안에서 중요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기대를 하고 그 안에서 금과옥조를 얻어내기 위하여 성경을 펼쳤다가 처음으로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이 이것입니다.
귀중하고 중요한 말씀을 만날 줄 알고 성경책을 폈다가 ‘낳고, 낳고, 낳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바람에 그만 기가 질려 가지고 성경을 덮어 버리는 경험이 적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태복음을 이렇게 시작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할 때 성경은 그 장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긴 족보를 나열합니다.
이 족보들은 보통 우리가 잘 모르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아브라함, 야곱, 이삭 등입니다.
그러나 이삭이나 야곱이 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 또한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유다는 베레스를 낳았다’ 이런 기록은 참 수치스러운 기록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다말은 바로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는데 라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기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요, 배반한 여인이요, 창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합을 과소평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기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 왕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이 기록들은 모두가 바로 다윗 왕이 하나의 초점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그런즉 모든 내수가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 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 1:17).
여기서 다윗이 중요한 어떤 분기점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왜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다윗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이고, 예수님을 이 족보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로 들고 있는 것을 1절에서 확인했습니다.
이제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왜 족보를 나열하고 그 족보 속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특별 취급해야 되는가?
창세기 12장으로 가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큰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족보로 대표되고 상징된 인물,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주려고 하느냐’는 것의 상징적인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바로 우리에게 한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무엇이냐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입니다.
바로 “내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이 족보 속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특별한 두 인물 중에 하나로 대표케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족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이 본문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을 실제로 보여 준 하나의 역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아브라함에게 허락된 그 약속은 그와 그의 후손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고 창대케 되고 복을 받는 것으로 약속되었지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복을 받고 창대케 되고 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태복음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한 역사를 하나님께서 치워버리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그 족보 속에 보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마태복음 1장 족보의 가장 큰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6장에서 실패를 합니다.
15장으로 우선 가 봅시다.
창세기 15:4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다시 약속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6장에서 하갈과의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 앞에 일종의 외면을 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17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 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들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1-7).
이 약속을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취소하거나 없애 버리느냐, 실패한 대로 방치하느냐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약속한 대로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도기 위하여, 그것을 마침내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으로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 후손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없으니까 이 후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후손에게 허락된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 후손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 약속을 마침내 이루게 하시려는 것, 그래서 등장한 족보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은혜의 풍성함이 또 하나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다.
우리는 족보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만 아니라 다윗을 또 하나의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다윗이냐 하면 그것은 이런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본토 아비 친척집에서 불러냄을 받아서 가나안 땅 남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위인을 상고할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위인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묘사가 달라지는데 그 묘사에서 가장 다른 게 뭐냐 하면 그 사람이 한 일이 조금 괜찮은 일이면 그 일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조금 잘한 것 보다 더 잘한 인물일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디에 살았고,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아주 위대한 인물일 경우에는 아예 그의 족보를 다 캡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한 일이 당 시대에 씨를 뿌리고 거둔 것으로는 너무 크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몇 대 전에 아니 몇 십대 전부터 어떤 시작이 있어서 결국엔 그것이 쌓여서 오늘날 이 사람 당대에 임하는 큰 일이 생겼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위인을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부터 이 족보를 따져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앞에 있는 족보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를 낳고, 유다는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한 이 족보들이 다윗 왕을 있게 했느냐 말입니다.
유다는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베레스를 낳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모압 족속입니다.
그 시아버지 되는 아비멜렉이 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모압 땅으로 이주해 가서 거기서 얻은 며느리인데 다 죽고 시어머니 하나만 남아서 시어머니하고 이 룻하고 돌아와서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오베스를 낳는 것입니다.
결국 이 족보에서 가장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다윗이라는 왕이 될 조건이 그 앞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앞뒤에 아무도 왕족이 일어날 만한 무슨 조건과 준비를 한 선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이유만으로 다윗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내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친척집을 나와 우리의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면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내신 그의 자녀들을 왕위에 앉힌다는 상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다시 봅시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르�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마 1:6-11).
그 뒤를 이은 왕족들이 모두 실패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나라는 망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왕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대로 후손들을 복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조건이 아닌 것으로 왕으로 앉힙니다만 그 왕위에 영광을 누릴 힘이 없어서 실패합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
실패해서 바벨론이 포로가 되어 잡혀 갑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12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2-16).
이 뒤 족보는 앞의 족보보다 더 심합니다.
앞에서는 망해도 왕에서부터 망하는 중이고 악해도 왕으로부터 악해 가는 중인데 뒤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는 이 왕족의 족보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요셉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따라 모든 민족 백성은 자기 본향에 가서 호적하라고 해서 등기를 하러 베들레헴에 갔을 때, 그는 아무런 유력한 인사가 아니었으므로 동네에서 그가 오는 것을 환영도 안 하고, 하나의 사건으로 등장도 안 하고, 아무런 영접조차 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굿간에 가서 머물러야 되는 지경까지 몰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복을 유지할 힘이 없고 저들의 힘으로 영광을 탈취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윗 왕을 세워 우리에게 허락 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이 족보를 끝내지 않고 이 실패대로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시려고 오시고 드디어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은혜의 왕 노릇을 보십니까?
다윗에 대해서는 사무엘 하 7장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갖는 왕권이 다음과 같은 상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 하 7:8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 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類)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8-16).
다윗 왕에게 준 왕권은 상징이 다른 것입니다.
사울 왕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힘과 자기의 충성도에 따라서 그 왕권이 유지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왕권은 실패해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하면 하나님이 삶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를 하실 것이지만 그 왕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왕권입니다.
다윗의 왕권이라면 다윗과 그의 가문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려는,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 모든 자녀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설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이 약속을 이루시는 그 왕권을 다시 확립하고 영원히 세우시는 은혜의 왕 노릇, 그 승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9:1에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는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 9:1-7).
이것이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위(位)라는 것은 특별히 다윗, 다윗 왕가 이것을 특별히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특별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되고 네게 허락한 것을 지키고야 말겠다. 네 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하리라.’
우리에게 허락한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안에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 필요한 모든 거룩한 것으로 분발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미련합니다.
우리는 완악 합니다.
게으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혼이 주의 손에 붙잡힌바 되고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간섭하는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간섭을 받으셔야 됩니다.
여태까지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지키신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앞날도 하나님이이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사 우리에게 허락한 이 모든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약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것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반대와 거부에도 이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부하시면 여러분이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인생의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두들겨 맞는 일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충성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이 약속들, 하나님의 이 복된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풍성하게 나타나는가 경험하시고 우리의 미련함과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실패되지 않는 허락된 구원과 은혜를 인하여 담대한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결심과 그리고 끊어지지 않는 감사와 찬송이 여러분 생애에 이어지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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