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_박영선

[스크랩] 로마서 31강(롬 5:15-17), 풍요한 구원

유승필 2008. 3. 1. 10:22
 

로마서 31강(롬 5:15-17), 풍요한 구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고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롬 5:15-17)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 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확인 작업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첫 번째 항목이 되겠고 ‘내가 얻은 구원이 최종성을 가지는가?’ 안전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도 구원의 확신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을 먼저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을 때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에서만 밝힌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운명이 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  것과 실패되지 않을 것을 믿고 우리 주님이 하늘나라에 가신 것같이 우리가 거기에 갈 것을 이제 믿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최종성을 확인하는 것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의 위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되었다는 것, 즉 새 생명을 얻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갖는 그 생명의 풍성함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구원을 얻은바,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갖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이 얼마나 풍성한 것이고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 소극적이고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아담의 후예로서 기업을 이을 자로 확보한 삶의 부요함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삼고 믿음의 원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본 본문에 의하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삶에게 넘쳤으리라”(롬 5:15)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볼 단어는 ‘더욱’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의 후예로서 우리가 가졌던 아담이라는 시조로 인하여 함께 걸머져야 했던 멍에들, 같은 원리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짊어질 멍에가 아니라 누려야할 복들과 은혜들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욱 더’란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범죄로 인하여 그 범죄가 우리에게 미친 사망 아래서 종노릇하는 하나님의 저주와 외면 속에 사는 불이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옛날에  우리의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과 이제 우리 믿는 자들의 시조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이 두 대표자는 어쨌든 인류의 대표자라는 그 성격상 같지만, 같은 원리와 넘겨줘야 할 유산들을 넘겨준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직분을 가집니다.


그러나 아담이 가졌던 직분과 예수님이 가졌던 직분은 한 쪽은 사망을, 다른 쪽은 생명을 만들어 낸 차원에서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것이 더욱 다른 것은 이런 것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로 죄와 사망을 받는데, 그 근거는 아담의 범법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끼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한 일의 그 대가를 받는 것인데 아담이 행한 것에 대한 대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에 대한 대가는 대단히 다릅니다.


왜 다르냐 하면 한 쪽은 범법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서 일종의 삯이고 그것이 바로 범죄 행위의 대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의 대가를 우리가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것보다 더 급니다.

왜 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려 하심입니다.

이 둘을 잘 비교해 보십시오.

아담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라는 어떤 중립 지대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서 복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때 우리가 확보해야 되는 중요한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근거로 갖는 대가라는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의도를 인식하고 있는 차원에서의 믿음의 확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보내진 분이라는 사상을 일단 머릿속에 넣기로 합시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갑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이것이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8-40).


분명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명을 바꾸려고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신자가 가져야 하는 믿음의 중요한 근거와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내가 무엇을 해서 대가를 갖는 어떤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려고 그의 은혜 가운데 강권하고 계시다는 사상인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그가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행한 어떤 것으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초래시키시려고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를 누가 보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한 일은 그가 한 일에 따라서 ‘그가 좌로 가면 결과가 좌측에 생기고, 우로 가면 결과가 우측에 생기는’ 그런 위치에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는 이 쪽, 저 쪽을 선택하러 오신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아주 중요한 근거와 기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내 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 편을 든다든가, 하나님을 붙잡는 결정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의지와 열심과 사랑에 대하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권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이리로 가고 한 쪽은 저리로 갔다는 방법론의 차이가 아닙니다.

허락된 결과가 차이가 난다는 말이지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죄인된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전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르냐면 한 쪽이 행한 일의 결과라면 다른 한 쪽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는 차원에서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써 무엇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미 확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더 중요한 설명이 있다면 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1:18로 갑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8-20).

“서로 변론하자” 무엇을 변론하자는 것입니까?

너희는 왜 범죄하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나름대로 핑계와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 중에 실패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지적하여 하나님은 저들로 하여금 핑계 댈 수 없게 하고 싶어서 변론하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옳은가를 증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을 회개 시키려고 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바로 용서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위하여 꾸짖는 것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을 봅시다.

신명기 8:1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1-3).


무엇을 알려고 40년 광야생활을 걷게 하신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려고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큰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내 편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 편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실패하고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과 미련함과 완악함을 볼 때 ‘이래도 하나님이 계속 내 편을 들어주실 것인가’라는 의심이 생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이토록 매달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열심을 부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이 편안치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편인가?’


하나님께서 이 고난에 찬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필요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시려 하시었느니라.”(신 8:16).

만나를 먹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거기에 자리를 잡고 터를 잡고 자기네들의 삶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논과 밭을 가질 틈이 없었고 집을 짓고  살지 못하던 장소로 그들이 늘 걸어 다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RP서 기적으로 만나를 주시지 않는 한 먹고 사는 것이 막막한 길을 다녔습니다.

고달픈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알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표자 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신자들의 특권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기 신앙을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 주심과 사랑하심과 열심 속에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자꾸 놓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을 드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편을  드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이 대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로마서 5:15로 오셔서 이 표현을 분명히 해둡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 5:15上).

범죄와 은사의 차이입니다.

아담을 우리의 시조로 하여 가졌던 죄와 사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여태 것 범법한 것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사(恩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범법한 행위는 그 범법한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저지른 범행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것에 불과하지만 은사란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의 가치와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 쪽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선물을 주는 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와 ‘나를 사랑하는 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그 두 가지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확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대신 죽인 것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압니다.

이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확보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 있느냐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구원에 대한 확신에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내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을 줄 이쁜 짓을 했는가?’ 여기에 너무 많이 집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일들을 등한시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신자의 길을 걸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근심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어떤 대가를 받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행하는 일들이지 어떤 보상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있는데 그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서 꼬마를 데리고 갔습니다. 과일 가게에 가서 그 어머니가 과일을 많이 샀더니 과일집 주인이 꼬마에게

“너 참 예쁘구나, 몇 살이냐?” “네 살이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가게집 주인아주머니가 그 꼬마가 귀여워서 “그 앞에 있는 버찌 네 마음대로 한 움큼 가져가라”고 하니까 고개를 저으면서 갖고 갈 생각을 안 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져가라. 마음껏 가져가라”

그래도 안 집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함께 부추깁니다.

“왜 가져가라고 하는데, 아줌마가 주는데 왜 안 받아.” 그래도 뒤로 손을 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인아주머니가 듬뿍 담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래 그 어머니가 집에 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너 왜 아줌마가 줄 때 안 받았니? 그랬더니 “아줌마 손이 제 손보다 크잖아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손만큼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만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놓쳐서 모든 신자들이 그토록 가난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

그 범죄한 사람, 아담의 실패에 상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담의 실패는 기껏 해봤자 얼마 안 됩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최고로 악질적으로 해 봤자 요즈음 값어치로는 한 삼천 원 어치밖에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하나님의 호의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있었던 사망과 또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 5:17).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기 때문에 차이가 납니다.


사망이란 죽은 것이 가장 최악의 경우입니다.

죽은 것으로 그러니까 죽은 시신을 열 두 토막 내든, 회초리질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죽음을 더 어떻게 끌고 가지는 못합니다.

죽음이란 최악의 상태입니다.

시체에다 더 모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시체로 이미 끝입니다.

사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이란 씨앗으로 있어도 생명이고 싹이 막 삐죽 나왔어도 생명이고 꽃이 핀 것도 생명이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도 생명입니다.

생명에만 ‘넘침’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망은 넘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사망에서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무엇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본문들이 사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생명에만 있는 것으로 부요함과 풍요함과 넘침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제일 불행한 일이 뭐냐 그러면 이것을 마치 씨앗으로 만들어서 비닐봉지에 싸서 금고 속에 넣어 놓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안 되는 최소한의 생명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꽃 피우질 못합니다.

그 부요함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명을 빼앗기느냐, 확보하느냐의 싸움 이상의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만이 유일하게 이 생명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풍성함에 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봉사하는 부서에서, 혹은 구역으로 모이는 곳에서 여러분은 세상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립니다.

여기만이 생명이 그 부요함을 나타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가장 좋다는 아름다운 보석을 나열하고 있어도 그 보석과 개나리 꽃 하나 피는 것을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가치가 비싸고 요란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모임 속에는 그 생명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십니까?


그래서 구원을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1:3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무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엡 1:3-8).


여기에 쓰인 단어들을 보십시오.

수식어들을 보십시오.

영광 위에 또 영광, 풍성함 위에 또 풍성, 기쁨 위에 또 기쁨, 영광, 찬송, 기쁨, 풍성, 충만 이런 단어들로 수식되어 있는 것을 보십니까?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입니다.

생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피었느냐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 생명을 빼앗기느냐, 확보하느냐의 싸움에 있지 않고 이 생명을 얼마나 번성시키느냐의 싸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사계절 중 그 가치에 비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계절이 여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덥고 벌레들도 많이 생기고 쩔쩔 매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그러나 여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칭찬을 해야 될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여름은 그 생명이 가장 왕성하게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태양이 작열하고 태풍이 불고 비가와도 생명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때가 여름입니다.

모든 생명이 그 모든 것을 이길 만큼 강한 때입니다.

그때 모든 식물들이, 또 동물들이 가장 활동적입니다.

생명의 힘찬 모습을 볼 때가 여름입니다.

그 쏟아지는 폭염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나무의 성장을 보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나, 태풍이나, 바람이나, 여러 가지에도 오히려 싱싱하게 크는 생명력을 보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흑암에 덮여 있고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를 삼키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우리 생명력이 더욱 힘있게 발휘되는 장소가 바로 이 세상이어야 됩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에베소서 3장에 신자들에 대하여 이런 요구와 또 확인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14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3-19).


하나님의 충만한 자리까지입니다.

대단한 요구입니다.

이것은 책임으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여기 14절을 다시 보면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들에게 이름을 주신 ”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각각의 존재가 각각의 가치와 구별된 가치를 가지고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시체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생명만이 이름을 가집니다.

그 각각에게 허락된 그 다양함과 부요함이 그 부요함 그대로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의 현실이요, 현재 위치요, 장차 완성으로 나타날 우리에게 약속된 운명입니다.


바로 로마서 5장에서 보는 ‘더욱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 가운데서 왕노릇해야 되는 신자의 부름입니다.

우리가 와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애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 속에서 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시는 계기가 되십시오.


요한복음 10:28로 가보십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의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누구에게 빼앗기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영생을 확보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가능성과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십니까?

그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보십니까?

그 생명 가운데서 왕  노릇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유일하게 거룩할 수 있고 빛으로 살 수 있고 여러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모든 것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자리에 설 수 있으며, 여러분만이 용서함으로 생명을 나누며 진리를 증거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생명을 낳듯이 여러분만이 죽은 영혼들을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허락된 육십, 혹은 칠십, 혹은 팔십, 이 인생이 결단코 고달픈 인생길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 기간 동안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 부딪히는 우리의 모든 사건들이 그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나타내야할 복된 자리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실패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십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매일 매일을 찬송과 감사 속에서 살아야 하고 승리를 기대하시며 사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존재와 삶이 이웃들 앞에 생명으로 나타나고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타나고 여러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와 그 영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 그 생명과 진리와 구원들이 낱낱이 증거되는 복된 삶이어야 됩니다.

이 삶에 실패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구원을 다시 확보하시고 주 안에 있는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산골짝촌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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