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0강(롬 4:23-25),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3-25)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 쪽에서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에 입각한 것이지 우리 인간들의 어떤 조건도 거기에 작용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우리 구원의 가장 중요한 논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믿게 하는 설득과 항복을 받아낸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었는가?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도장을 받은 그 믿음의 핵심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
다시 말하면 신자들이 갖는 이 구원 얻는 믿음의 핵심 되는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속에 잘 포함되어 있다고 성경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내용이 아니고 그 내용 속에서 가장 잘 밝혀진 ‘하나님’이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24절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데 그 하나님을 어느 차원에서 알아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차원에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근거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문제가 왜 이토록 우리에게 소중하느냐 하면 자유주의신학이라든가 신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관념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혹 인격자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싸움은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라는 방법이 유일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각 사회, 각 시대, 각 나라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불교인들은 불경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각각 선과 의를 행하며 더 높은 경지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결국 하나님 앞에 간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예수님의 부활이나 기독교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나 동정녀 탄생 같은 것도 모두 우리의 선과 의를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된 신화적 표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백운대를 올라가는데 꼭 우이동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느냐, 정릉으로 해서 갈 수도 있고 세검정으로 해서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백운대를 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군에서 훈련받을 때 M1 소총을 다 쏘아보신 줄 압니다만 그 소총은 목표를 겨냥하는 방법에 두 가지 필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앞에는 가늠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총구 맨 앞에 붙어 있고 그 다음에 이 총구 앞에 붙어 있는 가늠쇠와 가늠자에 눈으로 들여다보는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이 두 선상을 일치시켜서 목표물을 보아야 갖고 있는 소총의 총열이 목표지점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가늠쇠와 가늠자 두 개를 일치시켜서 보지 않고 가늠쇠 한 구멍만 보거나 가늠자 한 구멍만 갖고 보면, 사선으로 봐도 목표물이 보여서 구멍 하나로 목표물을 봤다고 해도 총열이 그 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어 있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며 찾지도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면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이 오심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면 상당히 배타적이고 편협하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거나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스스로가 추구하는 ‘선과 의’를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의 신은 근본적으로 관념론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주권자요, 존재하는 분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인간이 추종해 놓은 선과 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것이 어떤 힘이 되기도 합니다.
Power가 되거나 선이 되거나 의가 되는 일이 있는데 그 하나님이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 하나님을 믿되 그 하나님을 어떤 근거 속에서 믿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내용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우리 주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은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내용 속에 첫 번째 핵심 되는 내용입니다.
24절에 있는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보통 신자들이 ‘하나님’ 하면 성부 하나님을 연상하고 ‘주님’ 그러면 예수님을 연상하지 않습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주님이라는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라는 표현은 정확히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주라는 표현을 많이 쓴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는 세상이 평가하는 것같이 세계 4대 철인이거나 현인이거나 성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시각과 원리와 기준 속에서 하나님을 정의하시고 인식하셔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말속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선과 의 앞에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자 앞에 죄이고 그분이 그 앞에 죄 지은 자를 심판하는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온 천하 만물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인간은 그가 만드신 존재인데 그에게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하나님이 인정되어야 됩니다.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에게 범죄하고 배신하고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 앞에 벌 받을 일밖에 없는 인간, 이것이 인식되지 않고서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은 완전히 오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간다든가 다른 방법으로 인간이 보람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말속에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우리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그 앞에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는 분이요, 우리는 그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런 모든 것에 포함된 원칙과 기준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대체 얼마나 큰 벌을 받을 죄를 졌는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자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회개’라는 단어 아닙니까?
왜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죄인인가’가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는 우선순위에 올라 있는 어떤 감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언제나 붙어 다니는, 신자들이 그 신앙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중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이요, 기초들이요,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 놓고 하나님을 논하고 이것을 빼 놓고 신앙을 논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신앙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선을 이야기하고 의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았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25절,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4上).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또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성경적으로 깊이 인식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높으신 거룩함을 인식하며 벌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우리로서는 무슨 방법으로든 해결할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의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범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에 버리워졌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제사법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속죄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누가 범죄했을 때 그 범죄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받을 벌을 면하기 위하여 죄를 속하고 죄를 용서함 받는 제사법이 있습니다.
그때는 꼭 피 있는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양이나 염소나 소나 어떤 피 있는 동물을 잡아서 정한 희생제물을 자기 대신 죽이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하는 예식을 제사장이 드리곤 합니다.
또한 일 년마다 한 번씩은 꼭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데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백성 전체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양푼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혼자 들어갑니다.
그 지성소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인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그냥 들어가서는 그 죄값으로 죽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자리에 들어갈 때는 충분한 속죄제물을 갖고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의 피를 충분히 갚을 만한 어떤 제물을 갖고 들어가야 되는데 그것이 언제나 피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물을 갖고 들어갈 때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옷 중에 이런 기이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예복 위에 가운을 입는데 그 가운 옷자락에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소리가 나라고 방울 하나 석류 하나 방울 하나 석류 하나 이렇게 쭉 달아 놓습니다.
왜 소리가 나야 되느냐 하면 제사장이 들어갔다가 종종 죽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들어간 제물이 하나님 앞에 만족스럽지 못하면-아직 그의 흠을 다 가릴 만큼의 제물이 되지 못하면 들어간 자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제사장이 죽는 일이 있다는 것은 가지고 들어간 제물이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가치로서 불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일 살아서 나오면 어떤 뜻이 됩니까?
그 제물이 열납되었다는 것, 제사장이 살아서 나왔다는 것은 백성의 죄값으로 갖고 들어간 제물이 하나님 앞에 충분해서 백성들의 죄가 씻어졌다는 뜻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백성들은 제사장이 살아서 나오느냐 죽어서 나오느냐를 목이 빠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죠? 제사장이 죽은 게 문제가 아니라 죄가 안 씻어진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바치신 제물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살아 나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분이 바친 제물이 열납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망이 그를 가둬 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 제사장 직분의 상징성에서 주님의 부활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서의 효능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열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가 다 씻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만이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을 믿으며 우리의 선조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제 우리는 그의 후손으로서 죄인으로 태어나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죄를 대속할 제물을 준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제물로 보내사 스스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게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친히 그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를 죄 없다 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이 핵심을 점검합시다.
우리는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온 천하 만물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일반 종교가들이 논하는 하나님과 어떤 종교라는 것과 우리 믿는 사람들이 논하는 하나님과 종교,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논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들은 관념론이요, 궁극적으로 철학이요, 도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것을 뛰어 넘어서 신자로서 확인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가 그 앞에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 문제가 종종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런 꼴을 하고도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렇게 살다 죽어도 정말 천국에 갈 것인가?”
이것이 이제 이 믿음 가운데서 확인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24, 25절에 있는 원리들을 설명하는 중에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과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얻었느냐’는 두 가지 문제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의 설명대로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우리가 이제 인식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뭐냐 하면 그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확실하며 영원히 안전한 것이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또 급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그 예로 든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18절로 다시 갑시다.
4:18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시 봅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8-21).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자로서 저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보지 말고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느냐 하면 “네 후손이 하늘에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랬는데 그 약속을 얻을 때는 애가 없을 때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들어가고 백 세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서 그는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뭘 믿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걸 믿었다는 것을 믿음의 핵심으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로마서 4장이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하고 우리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렇게 살아가지고도 구원이 확실한가?’라는 의심이 늘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랍니까?
이 모양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동원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이요, 그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우리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그러니까 뭘 믿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실함과 의지력과 끈기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의지와 긍휼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종종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을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 그러고도 예수 믿는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하십시오.
좀 창피하긴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예수를 보내신 줄을 압니다.
이것이 신자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더 거룩해져야겠고 더 의로워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 크신 은혜와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으며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을 이 차원에서 확인하지 않는 한,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를 여러분에게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안심하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혼자 몇 번씩이나 좌절하고 의심하고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가장 확실한 내용, 가장 확실한 근거, 원리를 분명히 하셔서 여러분이 흔들릴 때 하나님을 다시 쳐다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백 세일 때 이삭을 주신 하나님, 그래서 그의 후손으로 국가를 이루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그 안에서 우리가 완성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다시 24절을 봅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넘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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