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9강(롬 3:27-30), 자랑할 수 없는 구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27-30)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 구원에 관한 이야기, 기본적인 내용들은 뜻밖에도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로마서 3:21-26에 이르도록 이 복음의 멋진 선언이 나오고 영광된 내용들이 소개된 후에 마치 사족같이 쓸데없어 보이는 27절 이하의 말씀이 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아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과 복음에 관한 내용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우리가 오해할 소지가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씀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못했느냐’는 결국 ‘자랑이 없느냐 있느냐’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27절, 28절에는 자랑에 관한 이야기가, 29절과 30절에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고 자랑할 데가 없다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둘은 같은 얘기입니다.
자랑의 한 국면이 적극적인 자랑으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그것이 훨씬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나타나면 차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부분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뜻밖에도 신자들 중에 많은 분들이 성경이 그토록 걱정하고 염려해서 덧붙인 내용들에 저촉되고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말씀을 추적해 나갈 때 신자인 여러분도 이 문제에 저촉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랑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할 때 ‘나는 구원을 얻을 만하다’ 그리고 차별이라는 면에서 생각할 때 ‘너는 구원 못 얻은 것이 싸다’, 즉 나는 구원 얻은 것이 마땅하고 너는 구원 못 얻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할 근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못되게 굴고 악질적으로 살고 사기치고 부도덕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넌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여러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반증입니다. 우리는 더 낫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는 어떤 사람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지금 나아진 것이지 나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대단히 오해합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고 하는 근거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로마서 1:18~3:20에 이르도록 지금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며 부패한가를 따졌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고 또 스스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획득할 자가 없음을 확인했고 그래서 십자가라는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이것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 하고 구원의 방법으로 율법을 주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얻지 못했고 그래서 이제 긍휼하신 하나님이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을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구원을 완성하셨고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요 착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것 없이 단지 믿기만 하면 당신 것이 된다.
이 구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상 위에 있다. 먹어라”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은가 하면 이런 식의 설명은 결국 자랑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었다, 차려 놓은 밥을 내가 먹었다, 그래서 나는 배가 불렀다,
너는 거절했다, 나는 믿었으므로 이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너는 걷어찼으니까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생각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자랑이 개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통로입니다.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는 식의 생각에 여러분들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오해시키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화의 차원에서 다루는 믿음이라는 표현과 칭의, 곧 신분적인 구원을 얻는 통로에서의 믿음이라는 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은 성화의 과정과 성화의 단계에서 쓰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내가 심어서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慢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어느 것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로 성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신서에 나오는 모든 글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
이것 역시 구원을 결단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믿음을 내 원인으로 내 결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은 언제나 성화의 단계에서 그렇게 요구됩니다.
우리의 책임이 요구되는 것은, 지금 로마서가 다루고 있는 것은 성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된 자리로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조건과 원인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그 구원이 내 것이 된다.’ 하는 생각만큼 우리를 혼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성화 단계에서 쓰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 칭의, 구원을 얻은 단계에서 성경은 우리의 조건이나, 우리의 믿음을 선택으로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로마서 3:22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첫눈에 보기에는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느낌이 드시겠지만 2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22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되어 있고 2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2절은 언뜻 보기에 내가 믿어야 된다는 것이 조건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4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는 그 구속은 우리의 조건입니까?
그 표현은 분명히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했다, 그것도 값없이 말입니다.
그럼 그 구속이라는 것은 내 조건이나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 금방 인정이 되십니까?
이 ‘말미암아’라는 단어야말로 22절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δια’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면 through입니다.
이것이 똑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가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22절,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24절,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redemption)
27절에 보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through what law)
같은 단어입니다.
“행위로냐 아니라 결국 믿음의 법으로니라”(through a law of faith)
그런데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조건과 원인이 아니라 통로, 매개체, 도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어떤 수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수준까지 가야 되는데 성결의 영으로 말입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우리가 율법을 이루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하면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내가 믿어서> 내 것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내는 것,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의를 예수 안에서 이루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전가하는 방법,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써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택하는 내 결정, 내 분별로 보면 자랑이 좇아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이지만 어떤 전도 운동 대회에서 이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I found It.” 나는 찾았네. 누구를 찾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여기서 ‘It’이란 무인격 대명사를 쓴 이유는 진리, 복음, 구원, 이것을 압축시켜서 “I found It”이라는 표어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구원의 전략이고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는 그것은 내가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하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눈이 떠졌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하면 구원을 얻었다 하는 표현은 꼭 수동태를 씁니다.
“I was won.” ‘이겼다’라는 단어를 과거분사로 써서 수동태로 “I was won.”
그러니까 누구에 의해서 승리되어졌느냐 하면 ‘by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드디어 잡아채도다 하는 뜻입니다.
“I found It”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찾았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꺼내셨도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은 그렇게 되어 있고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내 것으로 전가시키는 방법으로써만 등장합니다.
그래서 믿은 자체를 의로 정하시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이 의가 아니라 무엇이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이유는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우리의 의가 내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나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구세주로 가운데 두면 두 사람은 동등하고 차별이 없어지는데 믿음을 놓으면 차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자체를 의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혼자 독립시켜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그것 자체가 내용물이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때 그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동차에 태워 보낸 것이 믿음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태워 보내신 수송 수단,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구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내 차를 동원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올라가서 예수님을 모셔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준비한 수송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강조하는 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서 모셔온 내 차가, 내 믿음이 강조되고 거기에 자랑이 개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은 혼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그 자체가 대상이거나 그 자체가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과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은 수송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 봅시다.
구원이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조건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명히 합시다.
에베소서 2:4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4절, 5절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 속에 우리의 조건이 개입된 것이 무엇이 있나 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조건이 없습니다.
구원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믿음, 우리의 결단, 우리의 선택, 이런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6절을 봅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6-9).
믿음으로 말미암았지만 그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선물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9절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나쁜 사람을 만나거나 아무리 절망스러운 죄인을 만나도 그 모습 속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아야지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보든지 “그 사람과 내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그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을 가지면 안 됩니다.
경외하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것까지 구원하셨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그 차별의 차원에 가 봅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자랑이라는 모습이 적극적으로 나타날 때는 ‘구원의 원인을 내가 제공했다’라는 생각이 자랑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극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 구원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써 행위적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조금 다른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선천적 우월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좀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저 사람들은 그 존재가 나만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1-19).
이방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외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다. 너희도 주인이다.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다.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고 유대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좀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나으니까 율법을 주었고 다른 민족은 주어도 어차피 못 알아먹을 족속이고 그래서 율법을 안 주었고 그런 식의 우열의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신자들의 공통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나는 좀 나으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고 저 원수들은 베풀어 보았자 돼지에게 진주 던지는 것과 같으니까 은혜를 안 베풀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이 차별이라는 것을 왜 강조해야 되느냐 하면 이 차별은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으로 그 뿌리를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휴머니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휴머니즘으로 돌아오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에게만 진리와 권위와 모든 것이 있으며 그에게 엎드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과, 진리, 생명을 받아야 되는 인간의 위치를 탈출해서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광된 자리를 자기가 취합니다.
차별의 뿌리를 찾으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우침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도를 깨우치도록, 몰랐던 것을 알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어떤 지식일 뿐이지 나 자신, 내 속성,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자리로 가는 그 뿌리가 이런 차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런데 뿌리를 캐어 들어가 보면 하나님 밑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에 대하여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불교도와 기독교도가 만나면 누가 더 포용력이 있습니까?
불교도가 훨씬 포용력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불경을 안봅니다.
불교도들은 기독교도 인정합니다.
뭐라고 인정을 하느냐 하면 다 같이 인간이 착해지고 도를 깨우치자는 하나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도들을 우상을 숭배하는 못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쪽이 훨씬 포용력이 있고 우리는 편협합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진리를 갖고 있으니까 진리가 아닌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저들은 어차피 정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는데 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기차를 탔습니다.
특등실에 앉아서 오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하러 와서 당신 표를 보자고 하자
“사실은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인데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차장이 그러면 마침 여기 정치부 부장이 타고 계시니까 확인을 하자고 하자 이 사람이 속으로 ‘이제 큰일 났구나.’ 싶었지만 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건 그 때 가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차장을 따라 갔습니다.
“정치부 부장님, 이 사람이 당신네 신문 정치부 기자라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장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차장이 간 다음에 참 고맙다고 어떻게 알지도 못하고 그러느냐고 하니까 사실은 나도 가짜라면서 어차피 자기도 거짓말 시키고 와서 앉아 있는데 남보고 아니라고 그럴 필요가 뭐 있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르는데”
이것이 불교도들이 보는 기독교도들입니다.
그들의 포용력은, 포용력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포용력이 아닙니다.
어차피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틀린 것을 구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불교에 대하여 우리가 그렇게 날카로운 지적을 하느냐 하면 저들은 인간을 신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대오 각성(大悟 覺醒)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 인간이 잘나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와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못난 것으로 갑니다.
이 차이를 아십니까?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을 자랑케 하고 다른 사람과 여러분을 구별케 해서 결국 나중에 하나님과 동등 된 자리로 여러분을 추켜 올라가게 하는 것을 아십니까?
구원을 오해하면 이 구원에 대한 오해가 여러분의 구원을 취소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느냐와 못 받았느냐는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남을 시험하게 되고 여러분 스스로 헛된 신앙을 갖게 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게 되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놓치게 되면 언제나 사람 앞에서 여러분을 증명하려고 하고 여러분의 자존심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집중해야 되고 헛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썩은 밀알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영광을 가리고 서서 “나를 보라 나를 보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믿는다는 신자를 만났는데 그 신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위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무릎을 꿇는 격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 잘났다’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신자를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다 해라. 너 혼자 천당 가라. 난 안 간다. 네가 가는 교회라면 난 안 간다.’
이 시험거리를 여러분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시험을 받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은 로마서 1:18~3:26에서 이 구원에 대한 오해를 설명합니다.
무척 많은 장을 할애해서 구원이 어떻게 오해될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거기 나오는 오해들로는 자랑으로 가는 것, 율법에 대한 오해 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이 자랑이라는 문제에서 점검해 보셔서 여러분의 구원이 감사로 가고 있는지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방불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여 참으로 겸손한 자리로 가는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뛰기 전에 ‘어디로 뛸 것인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가야 되는가’를 알고 뛰셔야 됩니다.
무조건 뛰는 것같이 미련한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믿음에 매어 달려서 여러분을 치장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의 지적에 따라 두려운 마음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정당한 믿음을 소유하셔서 경외함이, 그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을 감사케 하시고 여러분을 한 알의 썩는 밀알로 기꺼이 가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자리로 여러분을 밀어 넣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들과 여러분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천하에 진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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