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9강(롬 6:6-11),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로마서 6장은 어떻게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가 심한 근본적인 이유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을 우리 인간 쪽에서의 선택, 의지, 결정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실패할 때에는 구원의 근거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의 구원 자체를 의심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 계속 확인되고 있는 성경의 주장은 구원에 관한 성격이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연합시켰다는 것으로 구원의 중요한 근거와 성경을 삼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체험, 신앙의 수준, 느낌 같은 것으로는 이 구원의 근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 상에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이들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가 임종 때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고 죽는 사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은 내가 혹시 나중에 죽을 때 정신이 혼미해져서 ‘주를 모른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문들은 구원의 근거를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의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10장에서 증거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말도 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의 결정, 의지를 분명히 구원의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성격은 가장 중요하게 에베소서 1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하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창세 전’이라는 말로써 설명합니다.
이유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구원의 근거이기보다 하나님의 작정, 즉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가 구원의 근거인 것을 보이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선택에 의한 구원을 여러분의 작정과 여러분의 신앙의 근거로 가진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게 되었고 예수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회심이나 여러분의 결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단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 구원의 결과를 마치 구원의 근거인 양 갖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임종 때 주를 부인하는 자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답은 이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이 선택과 하나님의 의지에 있는 한 그가 한 번 신자였으면 그는 영원토록 신자입니다.
죽을 때 딴소리를 한 것은 그의 의식의 착오이고 그 육신의 기능의 쇠약으로 인한 헛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중풍이 든다든가 커다란 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을 우리의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우리의 사지를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사고와 의식 구원은 그런 것으로 인하여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이 거듭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무엇으로도 우리를 주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자격과 의지의 견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신실한 영원성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담이 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신자가 아닌데 신자인 것으로 오해했다가 다시 신자가 아닌 본래 상태로 돌아간 자와 원래 신자였으나 잠깐 신자가 아닌 것 같이 행동하고 있는 자들과는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든가 해서 혹은 범신론적 어떤 하나의 이상이나 고급 사상으로서 기독교를 이해했다가 후일 “나는 아니다”라는 신자인 것 같았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과, 원래 신자인데 잠시 잠깐 타락한 사람에 대해서 구별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원래 신자이면서 타락한 사람은 죄를 짓고 죄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본인에게는 남의 집에 간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비참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었던 자가 신자였던 것처럼 굴었다가 본래 자기 위치로 돌아간 것은 비참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고 여태껏 내가 왜 딴 데 가서 놀았나 하는 후련함을 가집니다.
신앙을 걷어찬 것이 후련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근거 구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죄 속에 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역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 속에 가서 뿌리를 내리고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언제나 그것이 낯설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예수를 믿는다고 온 것이 남의 집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불신자들이 어떤 제약이나, 절제나, 희생 없이 자기 속에 가진 대로 사는 것을 볼 때 신자들은 가끔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나만 왜 절제해야 되고 나만 왜 참고 살고, 저 사람들같이 못 사는가 싶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하고 싶어서 어느 날 죄를 지어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외 없이 죄를 지으러 나간 것이 후련하지가 않고 자유롭지가 않고 비참할 뿐입니다.
그래서 “왜 그랬던가?” 후회하며 돌아오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신자로 살아서 겪는 억울함,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하고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날 안 도와 주시니 할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잘못해서 그렇다’라고 핑계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목사님도 그렇게 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이 편치 않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죄짓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신앙인으로 살기에는 부족하여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고 언제나 죄짓는 것이 좋고 교회에 온 것이 이상하면 여러분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잠시 죄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구원이 흔들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패한다는 것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 정상을 향해 오르던 그 자리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일만 미터 되는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천 미터쯤 올라가서 실패하면 거기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모습이 산 밑바닥에서나 중간에서나 꼭대기에 거의 다 가서 넘어진 것이나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진 장소에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시거든 거기서 또 위를 향하여 올라가십시오.
여러분이 3m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여러분이 30m를 다시 되짚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3000m에서 넘어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30m에서 넘어진 것과 3000m에서 넘어진 것과 8000m에서 넘어진 것은 똑같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비참함 때문에 여러분이 원래부터 바닥에 있었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어떤 분명한 것들을 확인했습니다.
즉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인 것을 확인했고 그리고 돌아갈 수 없음 또한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영역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취소당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차원인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형벌의 자리로 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그분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의 복 주심 아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문을 열어 두심이 있을 뿐 우리를 벌하시고 진노하시고 미워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를 드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과 복의 징계이며 결코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적극적인 삶에 대하여 신자들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신자들의 실패와 연약함이 그토록 두드러지게 표출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사망과 죄가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 대신 누가 우리를 주장합니까?
성경이 계속 이야기해 주십니다.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이 주장하십니다.
따라서 새 생명이 주장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의 삶입니다.
산 자인 성도들은 복의 근원입니다.
신자 때문에 이웃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셈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이런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벤허가 노예선에서 노를 저을 때 로마 함대의 사령관이 아리우스 제독이 승선했었습니다.
그들이 탔던 배가 침몰하고 아리우스 제독이 전쟁에 패한 줄 알고 자결하려 하자 벤허가 자결하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그 후 아군의 배를 만나서 구출되었을 때 전투에 이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아리우스가 벤허를 돌아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었구나.”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제가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내려오시다가 아브라함을 만나서 아브라함에게 그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며 구합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그래서 몇 명까지 간청했습니까?
의인 십인이 있으면 소돔 고모라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사회의 무슨 지도자들이 어떠냐에 대해 묻지 않고 거기 의인 10명이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위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가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신자가 신자답지 않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허락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인생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로 인하여 이 나라가 지켜지는 그 맛을 모르고 신자 노릇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받을 복도 놓치는 것입니다.
즉 복의 근원 노릇을 여러분이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까지 함께 복을 거절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 신자들의 최고의 약한 부분입니다.
우리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복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됨이 귀한 인생인 것을 아십시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을 복 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 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하럭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4-15).
이렇게 복 주시는 하나님은 지금 피난 가는 야곱의 입장을 아셨습니다.
하룻밤 유숙할 마땅한 곳이 없어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자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모든 복의 근원’이라는 복된 약속을 계승한 자로 인정하십니다.
그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약에도 있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 약속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가려할 때,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여호수아가 발바닥으로 밟고 다니는 모든 땅을 여호수아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산자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신자가 발을 디디는 모든 것,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거기에서 승리케 하시며 거기에서 복을 나누시고 은혜를 나누시고 생명을 나누실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막으며, 넘어뜨리며, 좌절케 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요,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이므로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 내용에 대하여 신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 즉 구원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엄청난 영광의 시작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 영광 된 길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문을 열고 들어선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들의 가난함은 어디에 머문 상태입니까?
우리가 이제 벌 받지 않고 천국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며 주저앉은 이것이 가장 가난한 신자의 모습인 듯싶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야곱에게 한 약속, 여호수아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주셨던 성격의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의 영광과 그 권리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에베소서 1:15 이하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과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5-19).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바란다는 기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까, 의심하는 불확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그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복되심, 우리를 향하신 사랑,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알기 원한다고 합니까?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 우리를 부르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인 무엇인가?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는 길입니다.
신자가 부름 받은 복된 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거나 하나님께서 외면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사 복 주시기를 원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지금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 구절을 오해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분발시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도록 하시겠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가장 사소한 일에도 너희로 하여금 만족한 인생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도 중에 슬픔을 만난 이가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 없는데도 ‘내가’ 감사하기로 하거나, 이마를 다쳤는데 눈이 안 다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이런 식의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무엇을 근거로 한 명령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8 하반절을 보시면, ‘범사에 감사하라’에 이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기뻐하라는 말씀은 나를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했으면 기뻐하라고 한 이가 기뻐할 것이 있게 하겠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 된 모든 신자들의 삶이며, 바꾸어질 수 없고 취소되거나 실패되어질 수 없는 신분이며 우리의 실제 권리들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각자가 오해했을 때뿐입니다.
신자 된 것을 감사하시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고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만일 실패했다면 실패한 것만큼 손해이고 여러분이 그것을 안 한다면 안하고 산 것만큼 손해일 뿐입니다.
성도들에게 허락된 성경의 약속들이 복의 근원으로 모든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사 승리와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신자 된 것을 스스로가 확인하시는 인생이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우리가 다니는 든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기필코 이루실 것을 이제 믿습니다.
부디 우리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지혜롭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게으름과 미련함에서 건져 주지사 지혜로운 신자로서 승리하며 우리의 생애를 지내게 하사 주를 만날 때 기쁨과 감사 가운데 만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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