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_박영선

[스크랩] 로마서 41강(롬 6:12-14), 다시 산 몸

유승필 2008. 3. 1. 10:25
 

로마서 41강(롬 6:12-14), 다시 산 몸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2-14)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문제를 물어보면 칭의가 되는 이 구원의 첫 단계는 자기가 결심을 하고 자기가 노력한 결과로 생각하여 성화를 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은 자신이 기도한 후 선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본문을 보시면 성화가 하나의 권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우리가 할 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코자 합니다.

첫째, 성화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어떤 체험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 맡겨서 주께서 성화되도록 해주시기를 빌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성화에 관한 내용으로서 바르게 기억해야 할 원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화를 우리의 책임으로 고정시킨다면, 이런 의문점이 생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전에 죄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실패할 수 없고 자녀 됨은 취소되지 않고 포기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준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시사 우리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예정하시고 이루시겠다는 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가만히 있으면서 구경꾼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성공해야 하나님이 성공하고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해답을 성경의 한 구절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명령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에서 신자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이 성화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성화에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도록 우리를 권면하시며 우리를 분발시키시며 필요하다면 매를 드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화에 성공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만있어도 된다는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을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기도해서 주님께 맡긴다는 식으로 성화를 생각한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주님께 나를 맡겨버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가 하는 추적이 필요합니다.

왜 신자의 성화를 주님께 맡기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가장 크게 오해를 야기한 사람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입니다.


그에 의하면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을 내가 없어지고 자꾸 주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주님을 강조하는 부분이야말로 워치만 니가 원래 의도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제가 그의 책을 보아서는 그는 우리가 우리의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듯합니다만 어쨌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 즉 우리를 주님께 맡기고 내가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신앙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은사에 대해서 신자들은 대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은사에 대하여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느냐면 성령의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고급 신자라고 인식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연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고급 신앙이 되었다고 오해하는 맥락 속에서 고급 신앙으로 가는 것, 성화가 더 깊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여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든가 그 사람을 더 높게 취급한다든가 그 사람의 신앙이 더 좋다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고린도전서 12:4-7에서 제일 중요시해야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은사에 성령님이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것, 성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왜 강조해야 됩니까?


그 이유는 이런 내용들 때문입니다.

어떤 다른 성도가 방언을 한다고 할 때 그 방언을 주신 그 하나님이 또한 나를 구원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성도에게 방언을 주신 하나님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대접하는 것처럼 동일한 그 하나님은 그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열심으로 충성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방언을 준 것이 더 신앙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은사를 주십니까?

은사로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신자를 유익하게 하려고 하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 어떻게 실제적인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은사를 받아야만 확인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야 된다는 면에서는 은사가 나타난 사람의 신앙이 조금 연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도마가 뭐라 그랬습니까?

그 손에 상처에, 그 옆구리의 상처에 자시의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만져 봐라, 만져 보고 확인하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은사 문제에서 그 은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선물 받는 것이라는 원리 때문에 그리고 은사를 가진 것이 마침 더 성화되어 있고 더 고급 신자가 되어 있다는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화를 기도하면 빌어서 받는 것으로 자꾸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의 근거로 보입니다.


두 번째 오해의 근거는 우리의 기도의 요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신 사건과 그 동안에 산 밑에서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주기를 부탁했다가 실패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 준 사건이 기록됩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8-29).

이것이 또 기도를 오해시키면서 성화도 오해시킨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려면 기도를 해야 된다는 등식을 만들어 벌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정확히 기도라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일종의 원리이고 자세입니다.

어떤 원리요, 자세냐 하면 신령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려면 영어책을 봅니다.

수학공부를 하려면 수학책을 봐야 됩니다.

책을 사려면 약방에 가지 않고 책방에 가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냥 책방에만 가면 영어나 수학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가 근거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령한 것과 영원한 것과 진리와 생명의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이지 그 일을 일으켜내는 방법과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런 일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며,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성화되고 거룩해지려면 하나님께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화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하나님을 뵈어야 되고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수학공부를 할 때 책을 펴가지고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실력이 늘 수 없습니다.

그나마 수학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설책을 읽는 것보다는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를 하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거기서 듣고 알게 된 것을 실천해야 됩니다.

주문과 부적은 누구로부터 시작되는지 어떻게 되는지 알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는 수단과 방법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적을 보면 이게 도대체 지렁이가 기어간 그림인데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기도를 그것들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생각한 것같이 우리는 성화를 무언가 가서 매어달라고 나 아닌 어떤 힘에게, 성령님에게, 혹은 주님께, 아니면 신앙적인 어떤 것에 나를 내던져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화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성화나 신앙생활에 관하여서는 신자들이 노력하고 훈련하고 연습해야 됩니다.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하나씩 깨우쳐 나가며 습관으로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어떻게 쉬게 합니까?

짐을 대신 지어 준다든가 짐을 없게 해 준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짐 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주님이 대신 해 주는 예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성경이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훈련하고 익숙하기까지 연습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19-22).


바울은 루스다라에 갔다가 거기서 앉은뱅이를 고쳐 준 죄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나중에 그가 살아나서 더베로 가서 전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돌 맞았던 루스드라에 다시 갑니다.

거기 있었던 성도들은 대단히 많은 혼돈 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지를 마드시고 모든 능력의 근거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그의 종을 돌 맞게 하셨을까?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은 필수과목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환난을 당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 이 환난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주님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허영심과 욕심을 밝혀 주고 그것을 끄집어내도록 도와줍니다.


신자가 환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이 성화를 우리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냥 선물로 주지 않는 그 증거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그런 연유로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근거로 인하여 다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성화를 추구하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냐’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디로 가야 될 생명인가를  묻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신자다워야 하며 주 앞에 가야 한다. 그래서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된다’

이렇게 성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근거로 제시한 바와 같이 성화의 기준은 ‘여러분의 행복과 기쁨을 위한 신앙’으로 갖고 있지 않으며, 성화를 여러분의 혈통과 자랑을 위하여 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가 실제로 어떤 계획 속에 들어가 있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여러분이 성화되어야 할 이유이며 근거이고 책임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가 누구인가를 제시해 놓고 그 근거 위에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이렇게 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1-24).

하나님의 새사람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5-29).


따라서 무엇과 무엇을 관련짓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새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물로 받지 않습니다.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해야 됩니다.

그리고 연습해야 됩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오해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기도원에 얼마나 많이 갔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가 자랑의 초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한 것, 여러분이 성경 본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현실 생활에서 거짓을 버리게 하고 분을 내지 않게 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하고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며 악덕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연습하셔야 됩니다.


교회 안에 서로 좋은 사람끼리 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는 여러분을 가장 많이 시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예수를 믿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법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보고 참아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성화되지는 않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처음에 그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 게 최고입니다.

부딪쳐서 화가 치밀 것 같을 때 도망을 가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맞대면하면 그의 발끝만 쳐다보십시오.

얼굴을 보고 인내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같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연습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속에 사이다가 튀듯이 사랑과 희열과 기쁨이 쏟아져 나와서 아무나 보고 껴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화를 기도해서 얻어내는 결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이 울어야 되고 많이 절망해야 됩니다.

성화를 실제로 경험하여 보십시오.


예전에 안현필 씨라는 영어를 잘 가르쳤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쓴 영어 자습서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오력일체] 어떻게 보면 신학적 용어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어학에 지름길이 없으므로 매일 연습하는 수밖에 없고 눈으로만 보지 말고 입으로 읊어야 되고 자기가 읊은 것을 귀로 들어야 되고 써야 된다고 해서 오력일체입니다.

머리를 동원하고 눈을 동원하고 입을 동원하고 귀를 동원하고 손을 동원해서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화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봉사기관에 가입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성화에 관한 연습을 스스로 하려고 기다리면 일 년 동안 한 번 할까 말까입니다.

그 한 번이 언제냐 하면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자선냄비에 돈 넣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훈련되기 위해서 자신을 봉사기관에 예속시키십시오.


학생들 중에는 엉뚱한 생각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을 하겠다는 학생이 가끔 생깁니다.

필요한 공부만 집중적으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열심을 낼 때는 학교 진도보다 더 열심을 내지만 보통, 사람들은 학교 진도보다 게으를 때가 더 많습니다.

학교에 나가야 공부하기 싫지만 숙제를 내 주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스스로의 힘에 맡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게으르고 교활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을 교회 안에 봉사할 곳들에 묶고 위원회에 소속되십시오.

장학위원회 같은 데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장학금으로 예산을 책정한 것 이외에 얼마나 많은 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하시고 여러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법을 배우십시오.

국내 전도부, 회에 선교부, 구제부, 관리부, 봉사부 다 참여하십시오.


안내를 해 보십시오.

우리 안내위원 중에 한 분은 안내위원이 된 다음부터 헬스클럽에 나갑니다.

의자 접었다, 폈다 하려고 말입니다.

성가대에 나오십시오.

그래서 남보다 일찍 나오는 법을 배우십시오.

연습한 곡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드릴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준비된 마음이 모두에게  상응(相應)되기를 바라는 안타까움에 한 번 서 보십시오.

이것이 성화의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산기도 들어가서 사흘쯤 굶고 내려오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이 가졌던 것 중 매우 큰 액수를 자선 기관에, 어느 교회에 내놓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 거룩한 몸부림이긴 합니다.

한동안 그것을 우려먹고 살고 또 그 약효가 끊어지면 갑자기 어디다 바치는 것은 신자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생을 한 후 한동안은 너무 떳떳하기 때문에 말도 조심하지 않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지 않게 됩니다.

성화를 가장 많이 그르치는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만 될 존재입니다.

그 일은 실패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성경의 선언입니다.


아무도 이 일에 실패하는 자가 없고 이 일에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여 선물로 여러분의 성화를 가질 수 없음을 명심하시고 하루라도 빨리 여러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신자의 길을 결심하고, 시작하고, 꾸준히, 꾸준히 연습하시기를 권합니다.


출처 : La Choza del Montesino
글쓴이 : 산골짝촌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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